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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70년대 빛바랜 월급봉투

작성자 ***

작성일10.11.01

조회수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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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내 손에는 1970년대 초 아내와 함께 쓴 누런 가게부가 들려 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신혼 초에 쓰기 시작한 가계부이다,

내가 받은 첫 월급봉급 봉투는 누런 봉투였는데 철필로 된, 가리 방 (프린트)이라는 비닐로 만들어진 필 림에 글씨를 철필로 새긴 프린트 용지에

검은 프린트 잉크를 롤러에 묻혀서 등사기로 밀어서 월급봉투를 만들어 직원들에게 주었다,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내가 봉급 탄 날 가계부에 적혀있던 그대로 기계부 내용을 여기에 소개해본다,

72년 5월10일 군산가는 시내버스 차비 30원, 오징어한마리 100원, 막걸리 한 되 60원, 성냥한통 25원, 연탄한장 25원, 조카 과자사준 돈 25원 순으로 적혀진 가계부를 보면서,

내가 살기도 어려웠지만 당시 얼마나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웠었겠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지나간 이야기이다, 이 당시 일선 면에서 말단 직원으로 일하던 면서기들의 서러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봄이 되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새마을 사업을 알리는 징을 쳐가면서 새벽종을 울려야 했고 ,마을마다 담당한 농가들를 찾아가 동내에 들어가, 집집마다 벼 품종 개량한, 통일벼를 권장하던 때라서.

깨쭉 잎이 나오는 봄날 벼 씨앗을 담글 때에 농가에서 막무가내는 벼씨를 무조건 물속에다 집어 넣어서, 그 농가가 벼농사를 그해 논에 심도록 종자를 담가주던 때 였 다,

이때 통일벼는 대단한 수확량이 당시의 우리나라 식량 사정을 해결하는 정부시책이었고, 나중에는 이 통일벼가 지금 재배하는 벼 품종개량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요지음은 쌀 농사 기술발달로 풍성한 수량으로 벼농사 수확을 하지만 대단한 일이었다. 면서기 들은 이렇게 일하다가 허기를 달래려고 국밥집이 들어선 구시장 골목은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선양동 산꼭데기에서 살았던, 우리 손윗 동서인 길수 형님이 수돗물을 양철동이에 한동이씩 팔았던 가게가 있었고, 선양동 아래 뒷 좁은 길에는, 지금 서울에서 사시는 의곤이 형님이 구멍가게를 하던 그때였다,

새마을 사업을 하려고, 동내에 자전거를 타고나가면 아이들은 팽이치기 ,구술치기. 자치기, 딱지치기, 돼지 오줌통을 말려서 신나게 하는 축구등 아이들 놀거리가 한정이 되었고,

만화경을 보여 주면서 별천지를 설명하여 가면서 변사가 되어 보여주던 ,허름한 가방을 들고 다니던 천연색 사진 한 장씩 보여주던 그분도 이 아침에 생각이 난다,

그때 한눈을 감고보던 남대문, 불국사, 에펠탑 여신상을 1원씩 주고 보았던, 세상 풍물구경은 어찌나 신기했던지 다시한번 더보려고, 아양을 떨었던 우리가 살았던 그 시절이다.

마을마다 골목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고, 천연색 빛바랜 딱지를 몇장을 사면 어찌나 좋았던지, 그날은 아이가 하루가 참 즐거운날 이었다.

나와 아내가 결혼해 신혼살림을 하려는 첫 보금 자리를 구하려고, 개복동 산 말랭이에 올라 갔다가, 흙벽돌로 만든 방에 들어서다, 뒷걸음 질 치면서, 떨어질 뻔한 낭 떠려지가 이 아침에 생각이 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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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수정일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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