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을 한자리 지켜온 오색 촛불의 의미
작성자 ***
작성일11.03.30
조회수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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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영 화백이 들려주는 군산이야기
평소 선생님께서는 나에겐! 언제나 화두를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군산 내항 이야기부터 자주 하시면서 으레 말문을 여신다. 군산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개화된 항구여! 일본사람들이 살 적에는 참 대단했지! 그것도 잊어버린 것들이 엄청나게 많 탕 게!. 째보선창 선술집, 명산동 기생집. 당시 조선에서 제일인 경마장, 명 월 관 요정. 히 로 스 가옥은 천왕 동생이 머물다 가고 한때는 큰 호텔로 썼지,
해방 후 군산 1호 호텔이지 주인이 다니는 문과, 집안일을 하는 일군들이 다니는 문이 달라, 귀빈이 다니는 문이 있고 또 안채 문이 따로 있어. 오늘은 옛이야기 중 일제강점기에 독립군 자금을 내가 만주에까지 가져다준 이야기를 흥미로워 하니까. 나에게 자세히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선생님의 젊은 그 시절들이 생각이 나시는지, 잠시 눈을 감으시고 말씀을 이어가신다. 당시 나는 먼 돈인지도 모르고 봇따리를 가져다준 거야,
전주 이야기는 참 많아! 지금 도청 자리여 그 옆에 사는 사람이 이 씨여 그런데 땅을 팔아서 부자지 그 사람이 어느 날 하루는 오라 해서 찾아 갔더니 무얼 한 봇따리 주는 거야. 만주에 가면 누가 찾아올 테니 이걸 좀 가져다주라는 거야, 수염이 많이 난 사람이었지, 내가 평소에 어딜 갈 때는 붓이랑 물감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지 내 짐 봇 따리에 목장갑을 하나에 5원 주면 사는데, 만주에 가져만 가면 160원 정도 받거든 몸에 지닐 정도로 많이 샀지, 신의주에서 기차로 가면 일본 순사들이 짐을 뒤지고, 남포 진으로 가면, 강물이 얼어서 건너갈 수가 있지,
중국 사람은 배로 가고, 조선 사람은 땟 목을 끌어서 건너다 배가 고프면 땟 목 엮은 줄을 잘라서 나무를 상인들에게 밀매했지, 압록강, 두만강 여러 번 건너다녔어, 전주에서 할아버지가 보낸 선물이라고 건네줬지, 나중에 알고 보니 돈 봇따리 여 허허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딱딱한 그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옛날이야기에 빠 저 드시면서. 6.25사변 피난시절 실향민들이 2만 5천여명 정도가 고향을 버리고 내려와 살던 그 시절, 군산에서 함께 사시면서 다정했던 우리나라 영화감독, 이 강 천씨와 가수 고 운 봉씨 이야기로 선생님의 말씀이다.
친구 중 한 분은 가수가 되고 싶어, 월명공원에 올라가 바위에서 목청을 고르던 김 영환 씨가 있고. 운보 김 기창 화백님이 거주 하시던 영화동 이야기 등, 더 많은 군산만 갖고 있던 흔적을 시간이 갈수록 많이 잊어버렸다고 아쉬워하신다. 그간 틈틈이 써오신 하 반영 화백님의 시(詩)작품 노트에는 이런 글들을 읽어 볼 수 있었다,
나 지금도 이승에 남아 있다. “밥벌이 못하는 그림 그리는 것은, 멋 댐 시 배곯아 가면서 머리 아파 가면서. 처자식 굶겨가면서, 낮이며 밤이며 손마디 옹이 가 박히도록 그림을 그려야 했던가!. 그러나 알고 있다. 나에게 과업으로 주신 분이 계시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그칠 수 없다, 아마도 이 생명 다하도록 말이다! 배운 것이 없어도, 나의 목표는 있다. 그 목표에는 가치가 있다. 멀고도 먼 길 목표를 지금 찾아와 있다,. 그래, 바로 눈앞에 그 목표가 서 있다, 나는 그 목표를 잡지 안 했다. 아직 그 목표를 위해 다듬이질 못했다. 목표 곁에다가 설 수도 없다, 아마도 마음속으로 다듬어지기를 바라는 것 일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말 하련다! 시간이여 남아 있어 주렴, 나 할 일이 많거든 잃어버린 시간일랑 그만두고 말이다, 94세 영이가 이승에서 사는 동안 진정으로 바라는 건, 생명처럼 소중한 내 새끼들이 모여질, 미술관 하나만 고향에 만들어졌으면 한없이 좋겠다 하시면서, 필자의 손을 꼭 부여잡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셨다 ...
평소 선생님께서는 나에겐! 언제나 화두를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군산 내항 이야기부터 자주 하시면서 으레 말문을 여신다. 군산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개화된 항구여! 일본사람들이 살 적에는 참 대단했지! 그것도 잊어버린 것들이 엄청나게 많 탕 게!. 째보선창 선술집, 명산동 기생집. 당시 조선에서 제일인 경마장, 명 월 관 요정. 히 로 스 가옥은 천왕 동생이 머물다 가고 한때는 큰 호텔로 썼지,
해방 후 군산 1호 호텔이지 주인이 다니는 문과, 집안일을 하는 일군들이 다니는 문이 달라, 귀빈이 다니는 문이 있고 또 안채 문이 따로 있어. 오늘은 옛이야기 중 일제강점기에 독립군 자금을 내가 만주에까지 가져다준 이야기를 흥미로워 하니까. 나에게 자세히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선생님의 젊은 그 시절들이 생각이 나시는지, 잠시 눈을 감으시고 말씀을 이어가신다. 당시 나는 먼 돈인지도 모르고 봇따리를 가져다준 거야,
전주 이야기는 참 많아! 지금 도청 자리여 그 옆에 사는 사람이 이 씨여 그런데 땅을 팔아서 부자지 그 사람이 어느 날 하루는 오라 해서 찾아 갔더니 무얼 한 봇따리 주는 거야. 만주에 가면 누가 찾아올 테니 이걸 좀 가져다주라는 거야, 수염이 많이 난 사람이었지, 내가 평소에 어딜 갈 때는 붓이랑 물감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지 내 짐 봇 따리에 목장갑을 하나에 5원 주면 사는데, 만주에 가져만 가면 160원 정도 받거든 몸에 지닐 정도로 많이 샀지, 신의주에서 기차로 가면 일본 순사들이 짐을 뒤지고, 남포 진으로 가면, 강물이 얼어서 건너갈 수가 있지,
중국 사람은 배로 가고, 조선 사람은 땟 목을 끌어서 건너다 배가 고프면 땟 목 엮은 줄을 잘라서 나무를 상인들에게 밀매했지, 압록강, 두만강 여러 번 건너다녔어, 전주에서 할아버지가 보낸 선물이라고 건네줬지, 나중에 알고 보니 돈 봇따리 여 허허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딱딱한 그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옛날이야기에 빠 저 드시면서. 6.25사변 피난시절 실향민들이 2만 5천여명 정도가 고향을 버리고 내려와 살던 그 시절, 군산에서 함께 사시면서 다정했던 우리나라 영화감독, 이 강 천씨와 가수 고 운 봉씨 이야기로 선생님의 말씀이다.
친구 중 한 분은 가수가 되고 싶어, 월명공원에 올라가 바위에서 목청을 고르던 김 영환 씨가 있고. 운보 김 기창 화백님이 거주 하시던 영화동 이야기 등, 더 많은 군산만 갖고 있던 흔적을 시간이 갈수록 많이 잊어버렸다고 아쉬워하신다. 그간 틈틈이 써오신 하 반영 화백님의 시(詩)작품 노트에는 이런 글들을 읽어 볼 수 있었다,
나 지금도 이승에 남아 있다. “밥벌이 못하는 그림 그리는 것은, 멋 댐 시 배곯아 가면서 머리 아파 가면서. 처자식 굶겨가면서, 낮이며 밤이며 손마디 옹이 가 박히도록 그림을 그려야 했던가!. 그러나 알고 있다. 나에게 과업으로 주신 분이 계시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그칠 수 없다, 아마도 이 생명 다하도록 말이다! 배운 것이 없어도, 나의 목표는 있다. 그 목표에는 가치가 있다. 멀고도 먼 길 목표를 지금 찾아와 있다,. 그래, 바로 눈앞에 그 목표가 서 있다, 나는 그 목표를 잡지 안 했다. 아직 그 목표를 위해 다듬이질 못했다. 목표 곁에다가 설 수도 없다, 아마도 마음속으로 다듬어지기를 바라는 것 일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말 하련다! 시간이여 남아 있어 주렴, 나 할 일이 많거든 잃어버린 시간일랑 그만두고 말이다, 94세 영이가 이승에서 사는 동안 진정으로 바라는 건, 생명처럼 소중한 내 새끼들이 모여질, 미술관 하나만 고향에 만들어졌으면 한없이 좋겠다 하시면서, 필자의 손을 꼭 부여잡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셨다 ...
최근수정일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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