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의 함정
작성자 ***
작성일07.12.31
조회수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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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10진법은 15세기 경에 인도에서 만들어 졌다.
이는 장사하는데 셈을 쉽게 하고 건물 짖기 위한 공학적 계산을 수월하게 했다.
그 즈음 한 카톨릭 수도사가 예수가 태어난 해를 1년으로 잡아 역사를 카운트 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는 유럽의 '막강한' 교황권에 힘입어 '기원‘ ‘전’ ‘후’가 나뉘는 시간관을 형성시킨다.
또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쓰고 있는 '표준 달력'(그레고리력)은 16세기의 교황 그레고리 13세라는 양반이
그의 권위로 '로마력'을 개정한 결과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현대의 물질만능주의와 상업주의에 기반한 디지탈리즘 [분절적인 세계관]이 추가되자,
현대 사회를 사는 이들은 ‘시간이 카운터 되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특히 9가 넘어가고 10으로 떨어지는 순간... 364에 1이 보태져서 그 상위 단위인 1(년)이 넘어가는 순간에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감상에 휩쌓인다.
이러한 감상을 만들어내는 내용물은 이러한 분절적시간관을 만들어냈던 재료와 같은 성격의 것이다.
즉 '올해는 내가 왜? 좀 더 갖지 못했나?(장사)' 혹은 '올해는 내가 왜? 여기 밖에 오르지 못했나?(권위)'
'내년에는 더더욱 더 많이 갖고 높아지자'는 식의...
아직까지도 아프리카 원주민이나 남아메리카 인디언들 몇몇 부족은 순환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단지 계절이 넘어가는 모양만 덤덤히 관조하기 때문에 12월 31일에 대한 별다른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굳이 그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보내는 '마지막날'에 대한 집착과 관심이
인간 생래적인 것도 아닌 것은 알수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모습은 너무 호들갑 스럽고 너무 '물질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행정적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일시의 규격화.
물건 팔아먹기위한 필요이상의 주의집중과 화려함.
언론이 밀어 붙이는 시간의 벼랑. 사건의 총정리...
인간에게 '남는 물건을 쌓아두고 팔기 위해 셈하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다면...
권위있는 양반들이 일시를 표준화 하고 그 시간관에 입각해서 인간을 통제하려는 수작이 먹혀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12월 31일이라는 시간 자체를 인식도 못했겠고 의미 부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뜩이나 우리가 하루 하루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다면,
가는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특별한 결의를 다져야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늘상 그 주워진 풍요에 기뻐하고, 늘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감사해야했을 '지금'을 지나쳐 버리고
그 '결핍'과 '피해의식'에 사로 잡힌 364일의 삶을 살아온 마지막 날에 또 다시 그러한 364일을 살기를
기원하는 모습을 보면 끝없는 연민이 밀려올 따름이다.
이러한 분절적 시관관의 함정을 분별할 수 없는 것은 그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이다.
이는 현대사회에 적응한 인간이 ‘하루 하루 스스로에게 떳떳할 기회’를 가질 '여유'?가 없는 것이
그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무한소유와 경쟁을 부추기는 대중소비사회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 푹 빠져 있는 인간은
그 속에서 ‘늘 스스로를 통찰하고 떳떳할 수 있는’ “시간낭비”를 할 수 없다.
그렇기에 1년에 딱 하루만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막연한 감상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함정에 빠진 인간의 364일이 '무료'하고, 끝없는 '경쟁' '질투' '파괴'를 동반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러한 삶을 '보람'으로 여기고 있는 이들이 상당한 것을 보면 그 함정의 깊이를 가늠하기도 힘들다.
저 '협작패들'이 한해를 바꾸는 의식의 절정에 시간은 다시 카운트 다운 된다.
10,9,8,7,6...
그 카운트 다운의 소리는
'다시한번 세계를 말아먹자'
'다시한번 후손들의 미래를 그르치자'
'다시한번 생태계를 파괴하자'
'다시한번 내 인생을 무의미하게 만들자'는 굳건한 다짐으로 보인다.
인간 욕망의 기반이 만들어낸 대중소비사회의 산업구조는 올해도 역시 수 많은 산과 대지를 황폐화 시켰다.
또한 서해바다를 망가트려 놓았다.
그들의 분별없는 욕망이 멈춰지지 않는 한 앞으로는 더욱 큰 파국이 누적될 것이고,
이에 따른 후손과 생태계의 존립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자체에 그 파괴의 씨앗이 있음을 전혀 알려하지 않고,
5,4,3,2,1,0 이후로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이곳'에서,
그들이 파괴할 세상을 앞에 두고 기뻐 날뛸 것이다.
-
2007년 4월 6일자로 국제연합에서는
현대 대중소비사회가 만들어낸 지구온난화 현상의 심화로 인하여
앞으로 20년 내에 양서류가 전멸하고, 이번 세기가 지나기 전에 대부분의 생물들이 멸종하며,
우리 후손들의 삶이 파국에 다다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만들어내는
이 야만적인 사태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더 많은 소유와 소비를 향한 삶에 몰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 우리가 떳떳한 '지금'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는 장사하는데 셈을 쉽게 하고 건물 짖기 위한 공학적 계산을 수월하게 했다.
그 즈음 한 카톨릭 수도사가 예수가 태어난 해를 1년으로 잡아 역사를 카운트 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는 유럽의 '막강한' 교황권에 힘입어 '기원‘ ‘전’ ‘후’가 나뉘는 시간관을 형성시킨다.
또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쓰고 있는 '표준 달력'(그레고리력)은 16세기의 교황 그레고리 13세라는 양반이
그의 권위로 '로마력'을 개정한 결과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현대의 물질만능주의와 상업주의에 기반한 디지탈리즘 [분절적인 세계관]이 추가되자,
현대 사회를 사는 이들은 ‘시간이 카운터 되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특히 9가 넘어가고 10으로 떨어지는 순간... 364에 1이 보태져서 그 상위 단위인 1(년)이 넘어가는 순간에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감상에 휩쌓인다.
이러한 감상을 만들어내는 내용물은 이러한 분절적시간관을 만들어냈던 재료와 같은 성격의 것이다.
즉 '올해는 내가 왜? 좀 더 갖지 못했나?(장사)' 혹은 '올해는 내가 왜? 여기 밖에 오르지 못했나?(권위)'
'내년에는 더더욱 더 많이 갖고 높아지자'는 식의...
아직까지도 아프리카 원주민이나 남아메리카 인디언들 몇몇 부족은 순환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단지 계절이 넘어가는 모양만 덤덤히 관조하기 때문에 12월 31일에 대한 별다른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굳이 그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보내는 '마지막날'에 대한 집착과 관심이
인간 생래적인 것도 아닌 것은 알수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모습은 너무 호들갑 스럽고 너무 '물질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행정적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일시의 규격화.
물건 팔아먹기위한 필요이상의 주의집중과 화려함.
언론이 밀어 붙이는 시간의 벼랑. 사건의 총정리...
인간에게 '남는 물건을 쌓아두고 팔기 위해 셈하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다면...
권위있는 양반들이 일시를 표준화 하고 그 시간관에 입각해서 인간을 통제하려는 수작이 먹혀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12월 31일이라는 시간 자체를 인식도 못했겠고 의미 부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뜩이나 우리가 하루 하루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다면,
가는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특별한 결의를 다져야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늘상 그 주워진 풍요에 기뻐하고, 늘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감사해야했을 '지금'을 지나쳐 버리고
그 '결핍'과 '피해의식'에 사로 잡힌 364일의 삶을 살아온 마지막 날에 또 다시 그러한 364일을 살기를
기원하는 모습을 보면 끝없는 연민이 밀려올 따름이다.
이러한 분절적 시관관의 함정을 분별할 수 없는 것은 그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이다.
이는 현대사회에 적응한 인간이 ‘하루 하루 스스로에게 떳떳할 기회’를 가질 '여유'?가 없는 것이
그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무한소유와 경쟁을 부추기는 대중소비사회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 푹 빠져 있는 인간은
그 속에서 ‘늘 스스로를 통찰하고 떳떳할 수 있는’ “시간낭비”를 할 수 없다.
그렇기에 1년에 딱 하루만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막연한 감상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함정에 빠진 인간의 364일이 '무료'하고, 끝없는 '경쟁' '질투' '파괴'를 동반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러한 삶을 '보람'으로 여기고 있는 이들이 상당한 것을 보면 그 함정의 깊이를 가늠하기도 힘들다.
저 '협작패들'이 한해를 바꾸는 의식의 절정에 시간은 다시 카운트 다운 된다.
10,9,8,7,6...
그 카운트 다운의 소리는
'다시한번 세계를 말아먹자'
'다시한번 후손들의 미래를 그르치자'
'다시한번 생태계를 파괴하자'
'다시한번 내 인생을 무의미하게 만들자'는 굳건한 다짐으로 보인다.
인간 욕망의 기반이 만들어낸 대중소비사회의 산업구조는 올해도 역시 수 많은 산과 대지를 황폐화 시켰다.
또한 서해바다를 망가트려 놓았다.
그들의 분별없는 욕망이 멈춰지지 않는 한 앞으로는 더욱 큰 파국이 누적될 것이고,
이에 따른 후손과 생태계의 존립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자체에 그 파괴의 씨앗이 있음을 전혀 알려하지 않고,
5,4,3,2,1,0 이후로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이곳'에서,
그들이 파괴할 세상을 앞에 두고 기뻐 날뛸 것이다.
-
2007년 4월 6일자로 국제연합에서는
현대 대중소비사회가 만들어낸 지구온난화 현상의 심화로 인하여
앞으로 20년 내에 양서류가 전멸하고, 이번 세기가 지나기 전에 대부분의 생물들이 멸종하며,
우리 후손들의 삶이 파국에 다다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만들어내는
이 야만적인 사태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더 많은 소유와 소비를 향한 삶에 몰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 우리가 떳떳한 '지금'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하며...
최근수정일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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