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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작성자 ***

작성일11.01.10

조회수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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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7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원래 몸이 불편하신 상태여서 오래 사시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돌아가셔서 마음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 당혹스럽다. 또한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죄책감이 뼈저리게 느껴온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나는 많이도 불효를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버지에게 혼났던 일. 그
리고 함께 언성을 높였던 일들이 첩첩한 기억으로 쌓여 있고 이는 나머지 내 생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을 것이다.

아버지는 막내 자식이 이상한 짓만 하고 다니는 것이 못내 불편히 여기셨다. 그 나이 되었
으면 돈벌이도 하고 여자도 만나고 장가도가서 손자도 안겨줄 생각을 했어야 했지만, 돈벌
이는 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것에 못내 불편해 하셨다.

과거로부터 캠페인 할 것을 챙겨 집을 나서려고 할 때, 아버지께서는 ‘씩씩’ 거리면서 다가
오셔서 ‘이런 것 하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며 걱정의 말을 쏟으시며 분노 하셨었다.
이에 나는 ‘이런 세상을 보고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아버지를 뿌리치며 피켓을 들
고 거리로 나오곤 했다.

물론 그렇게 활동을 위해서 길바닥으로 나온 나를 환영해주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지역의
환경-정치의 부조리를 규탄하려고 피켓팅을 하고 전단지를 나눠주고 다닐 때... 일명 행정깡
패라고 불리는 이들로부터는 두들겨 맞았고, 지역의 정치인들로 부터는 ‘반대의 반대만 하
는 세력’이라는 규탄을 받았으며, (정치인들의 선동을 통해서)막연한 발전의 환상을 품고 있
는 시민들로부터는 “당신 같이 지역발전을 저해하는 이들은 찢어 죽여야 해!”라는 소리까지
를 들어야 했다.

그렇게 만인의 적으로서 하루 종일 길바닥을 돌아다니다 지쳐 집에 들어갈 즈음에는 녹초가
되곤 했다. 축 쳐진 어깨를 하고 피켓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시는 아버지께서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아버지는 다시의 걱정의 말씀을 하셨고 나는 낮에 길바닥에 쌓였던 스트레스
를 풀어냈다. 토요일 일요일은 물론 심지어 명절에도 캠페인을 하고 다녔고, 바지에까지 부
정한 정치인 비판하는 내용을 글씨로 새겨 입고 다니는 등으로 삶 자체가 캠페인이었음에
이를 탐탐치 않게 여기시는 아버지와의 불화는 1년 365일 지속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환으로 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하신 후에 나는 효자가 되었다. 거동도 못
하실 만큼 기력이 쇄하셨으나 자식을 걱정하는 눈빛만 유독 초롱초롱 하셨던 아버지가 “직
장은 다니고 있냐?”고 걱정스레 물어 오실 때 마다, 나는 “좋은 직장 잘 다니고 있네요.”라
고 답변 드림으로 아버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게 해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에게 자식의 도리를 함으로 행복감을 드리는 것을 ‘효도’라고 정의할라 친다면, 그렇
게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어 냈던 그 몇 초간이 나라는 인간이
아버님께 해드렸던 효도의 전부였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야 했음에 죄 된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2대째 병역기피 국회의원 규탄 캠페인을 나가려
고 전단지를 추스르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소식을 듣고 서둘러 옷을 추슬러 병원을 향했으
나 아버지는 이미 운명하신 다음이었다. 근래 캠페인 활동에 정신없어서 자주 찾아뵙지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며칠 사이 아버지 찾아뵈려고 갈등하다가 그냥 전단지 추려서 캠
페인 나갔던 결정을 내렸음으로 아버지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던 것은 아마 내 죽기 전까지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환경운동에 소명을 걸고 있는 이유로 자동차는커녕 자동차 운전면허도 따지 않
고 대중교통만 이용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병원까지 한 시간에 한 대
오는 버스 두 번씩 갈아타고 찾아 들어가기가 여의치 않았던 터이다. 모두 변명의 말이긴
하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병원에 도착하고 보니 난감한 마음이 이를 데 없었다.

몸에는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버지는 찬
공기를 뚫고 달려와 꽝꽝 얼어있는 손을 그 온기로 녹여주심으로 나에게 마지막 은혜를 베
풀어 주셨다.

흔히들 사람들은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서 살아생전 그 낳아 주시고 키워주신 은혜를 보답하
지 못했음의 불효에 대해서 참회를 하곤 한다. 이제 이승의 사람이 아닌 이유로 더 이상 고
인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낭패감을 갖고 슬픔에 빠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불효자이기는 하지만 전혀 그러한 낭패감을 갖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아버지
의 이마에 손을 얹고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마지막 온기를 감사히 여기며 다짐을 했
다. ‘비록 당신에게 받은 은혜를 당신에게 갚지는 못했지만, 당신으로부터 받은 그 은혜를
내 자식세대에게 기필코 되갚겠다.’고...

내 자식세대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생기니, 나는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과 슬픔에 빠져 있
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당장이라도 뭔가 해야겠다.’는 더 큰 결의가 솟구쳤다. 아마 그것이
바로 장례절차가 끝난 직후 전단지를 추려서 캠페인을 나갔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평생 새 옷 한 벌 자기 손으로 사 보신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식을 위
해서 헌신하시던 어머니가 회사에서 일하시는 중 뇌졸중으로 쓰려지셔서 돌아가셨다. 그 후
어머니 무덤 앞에 설 때마다 매번 ‘당신에게 받은 사랑의 10분의 1이라도 당신의 후손들에
게 갚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결의를 하곤 했는데, 아버지의 죽음으로 내 어깨는 더욱 무
거워졌다.

이렇게 나는 새로운 소명이 내 마음속에 성장했음을 살피며, 이에 따라 보다 더 열심히 나서서
활동해 야할 의지를 다져본다.


--- 아버지를 장례를 마친 2011년 1월 10일 밤에 씀



* 참고로 근래에는 2대째 병역을 기피하고도 이에 대한 사죄의 말 한마디 없는 국회의원
규탄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도 과거로부터 어머니 무덤 앞에서 하는 ‘다짐’의 일환이
다. 국가 지도층이 이렇게 노블리스 오블리제(지위에 맞는 책임)가 없어서야 우리의 미래세
대들이 희망을 갖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진 작은 힘으로 내일의 세대에게 타
당한 삶과 희망의 이유를 제공하고 싶은 것이다.

하여간 그래서 병역기피 국회의원의 실체를 알리는 활동을 하는 중에 적반하장으로 그 국회
의원에게 고소를 당했다. 그리고 이렇게 아버지 상을 치루며 슬픔에 빠져 있는 중에 출석요
구서(3차)가 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받던 나의 슬픔은 분
노로 바뀌어지고 아버지에게 불효했던 회한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한 굳은 결
의로 뒤바뀌었다.

하여간 강봉균 국회의원측에 거듭 감사드린다. 꺼져갈만 하면 그 불씨에 휘발유를 끼얹어
주심에...


** 그리고 빈소를 방문해주셨던 조문객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본인처럼 사람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근래 1년간 본인이 다른 사람의
빈소에 들려서 조문을 하거나 결혼식장에가서 축하를 했던 경우는 단 한건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러한 폐륜은 인생에 대해서 진지한 숙고한 결과였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 경조사비
챙겨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돈으로 전단지 한장이라도 더 만들어 뿌리고 피켓이라도 하나
더 만들자고 결심을 한 10년 쯤 전 부터 그렇게 살아왔다.

물론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덕분에 상당수의 선후배들과 지인들과 친구들이
섭섭함을 호소하며 떨어져 나갔다. 그로 인한 상처가 컸지만, 어쩔수 있겠는가?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음이 삶인 것을...

어쨋튼 그럼에도 이 부족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조문와주신 많은 분들께 진정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혹시나 이후에 본인이 답례를 해드리지 못하더라도 그렇지 못한 만큼이 세상을 좀 더 밝
게 하는데에 대신 그 힘을 쓰고 있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본인이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로 연락을 안해줬다고 섭섭히 여기실 분들
에게도 양해를 바란다. 그냥 그 마음 가져주시는 것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 1234yz@daum.net

http://cafe.daum.net/sos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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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수정일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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