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군산의 지역성 분석
작성자 ***
작성일13.11.14
조회수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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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정리하느라고 경기 날 정도로 고생했습니다.ㅠㅡ 이곳 군산의 지역성을 이해하는 것
은, 이 나라에 만연하는 전체주의와 배타주의, 개발만능주의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건’, ‘중요인물’과 함께 군산의 지역성을 분석했습니다. 시간이 넉넉하신분만 보시기를.
사진과 함께 보시려면 가장 아래 링크된 곳을 클릭하세요.
제목 : 군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군산이라는 지역은 내 고향이지만, 지역의 부조리가 이마큼 가득한 지역을 다른 곳에서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군산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 일제 강점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군산은 일제에 의해
서 1899년 강제 개항되었다. 일제의 식량 수탈창고였던 군산은 원활한 곡물 수송을 목적으
로 대단위토목공사가 이뤄졌는데, 이를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의 집적이 군산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에 1908년 조선 내에 처음으로 생긴 도로가 군산-전주 간 전군도로
이다.
[수탈미곡 선적 장면 / 사진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이 길은 조선의 국부(주로 쌀)와 문화제 등이 수탈되는 통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1930년부
터는 일본의 농림정책의 성공 덕에 조선 곡물의 수탈 필요성이 적어지면서 군산은 일본의
자본주의를 전파하는 통로로 변모해 갔다고 한다. 이에 군산은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
면서 호남 최고의 상업도시로 성장하였다.
[구 조선은행 /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를 위한 대표적인 금융시설로 1922년에 준공 되었다.]
[군산에는 현재도 일본인들이 살던 가옥과 일본인 가옥풍의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나 개항 당시에는 조선인이 500명밖에 안 되었는데 1920년에는 인구가 물밀듯이 유입
되어 1만 3천명으로 늘었다. 그런데 그 중의 반이 일본이었기에 ‘매국노’들이 들끓었을 테
고, 그 매국노들의 대부분은 기득권세력이었음은 짐작할 만하다.
[1900년 개항 직후의 군산 / 사진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그들이 해방 후에 군산지역 상공업을 좌지우지 했다. 하여 각종, 첨단 전자제품이 난립하기
전, 일제가 닦아 놓은 근대화의 기반이 효과를 발휘하던 70년대까지는 군산은 그들의 손과
입에 놀아났을 것이다. 이렇게 ‘조선수탈의 창고’역할을 성실히 해내며 번영을 구가하던 수
구적 지역성은 ‘사회정의를 등한시하고 발전 만에 몰입하는 집단이 빚어내는 부조리’를 계
속 생산해 낸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정미소 미선공들의 투쟁과 서수, 옥구 농민 80명이 구속되었던 소작농 쟁의 등, 일제
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중 저항 운동이 간간히 이어져서 조선민중들의 의기를 드높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혁명적 활동은 아니었고 처우개선을 요구하
는 외침으로 다만 노동운동사에 기록될 사건들이었다.
특히나 군산은 일본 자본주의 전파의 창구이면서 기독교 근본주의(구호 : 예수천국 불신지
옥) 선교사들을 조선에 유입시키는 통로이기도 했다. 이렇기에 군산은 전 세계에서 면적대
비 교회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는데, 그 다수가 근본주의에 뿌리를 두
고 있다. 그렇기에 군산지역 상당수 교회의 신앙은 ‘사회문제에 대한 성찰’, ‘생명에 존중의
식’, ‘주체의지’등은 찾아 볼 수 없고, 집단주의 감성을 바탕으로 지도자들에 대한 맹목적 믿
음과 복종이 난립한다. 이렇기에 군산에 새만금 사업과 핵폐기장 사업이 추진되던 당시, 기
독교연합회에서 사람을 모아 군산공설체육관에 수천 명을 모아놓고 (군산출신)장경동 목사
등을 불러서 ‘그것들이 유치되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들어 달라.’며 기도회를 했을
정도이다.
특히나 이러한 근본주의적 믿음은 자기 성찰능력을 거세하면서 ‘신의 대리인’들에게 자신을
내 맡기는 비주체적 모습을 파생시키는데, 강근호 전 군산시장이 군산 역 앞에 5천명의 시
민을 끌어 모아 ‘새만금 관제데모’를 했을 수 있던 것, 핵폐기장 유치 과정에서의 정치권과
기득권들의 바람몰이가 유독 잘 먹혀들었던 것은 그러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강근
호 군산시장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후 퇴진했다.
[2004년 새만금 궐기대회 시 풍경 / 당시 홀로 “정신 차리세요. 군산시민들.”이라는 피켓을
들고 온갖 수모를 당하며 찍은 사진.]
민주적으로 사안을 조율하려 하지 않고, 힘 있는 제왕적 존재가 군산을 좌지우지하는 극적
인 사례의 또 하나는 ‘강봉균 전 국회의원’의 경우였다. 정보통신부 장관, 재정경제부 장관
을 역임한 16대, 17대 민주당 국회의원 강봉균은 일단 받기만 하면 당선이 되는 민주당 ‘시
-도의원’ 공천권을 가진 ‘공천위원장’이 되어 군산지역의 시의원들을 주물럭거렸다. ‘핵폐기
장은 안전하고 좋은 것이다.’면서 읍면동을 돌아다니면서 의정보고회를 하고 다닐 때는 가
는 곳마다 시의원들이 얼굴마담을 하러 수행을 다녔다. 시의원들은 알아서 길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맘에 안 들면 공천권을 안주는데 어쩌랴? 그렇게 강의원이 시의원들을 길들여 놓
았던 이유는 국회의원 재선이나 도지사직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나만 믿
고 따르라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그러했느니라.’ 이것은 성경의 문장이면서 그 당시 강봉균
의원을 위시한 군산 정치판의 현실이기도 했다. ...(중략)...
사진과 함께 계속 보기 (주소창에 클릭해서 붙임.)-> http://j.mp/1fD16Zm
은, 이 나라에 만연하는 전체주의와 배타주의, 개발만능주의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건’, ‘중요인물’과 함께 군산의 지역성을 분석했습니다. 시간이 넉넉하신분만 보시기를.
사진과 함께 보시려면 가장 아래 링크된 곳을 클릭하세요.
제목 : 군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군산이라는 지역은 내 고향이지만, 지역의 부조리가 이마큼 가득한 지역을 다른 곳에서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군산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 일제 강점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군산은 일제에 의해
서 1899년 강제 개항되었다. 일제의 식량 수탈창고였던 군산은 원활한 곡물 수송을 목적으
로 대단위토목공사가 이뤄졌는데, 이를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의 집적이 군산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에 1908년 조선 내에 처음으로 생긴 도로가 군산-전주 간 전군도로
이다.
[수탈미곡 선적 장면 / 사진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이 길은 조선의 국부(주로 쌀)와 문화제 등이 수탈되는 통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1930년부
터는 일본의 농림정책의 성공 덕에 조선 곡물의 수탈 필요성이 적어지면서 군산은 일본의
자본주의를 전파하는 통로로 변모해 갔다고 한다. 이에 군산은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
면서 호남 최고의 상업도시로 성장하였다.
[구 조선은행 /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를 위한 대표적인 금융시설로 1922년에 준공 되었다.]
[군산에는 현재도 일본인들이 살던 가옥과 일본인 가옥풍의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나 개항 당시에는 조선인이 500명밖에 안 되었는데 1920년에는 인구가 물밀듯이 유입
되어 1만 3천명으로 늘었다. 그런데 그 중의 반이 일본이었기에 ‘매국노’들이 들끓었을 테
고, 그 매국노들의 대부분은 기득권세력이었음은 짐작할 만하다.
[1900년 개항 직후의 군산 / 사진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그들이 해방 후에 군산지역 상공업을 좌지우지 했다. 하여 각종, 첨단 전자제품이 난립하기
전, 일제가 닦아 놓은 근대화의 기반이 효과를 발휘하던 70년대까지는 군산은 그들의 손과
입에 놀아났을 것이다. 이렇게 ‘조선수탈의 창고’역할을 성실히 해내며 번영을 구가하던 수
구적 지역성은 ‘사회정의를 등한시하고 발전 만에 몰입하는 집단이 빚어내는 부조리’를 계
속 생산해 낸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정미소 미선공들의 투쟁과 서수, 옥구 농민 80명이 구속되었던 소작농 쟁의 등, 일제
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중 저항 운동이 간간히 이어져서 조선민중들의 의기를 드높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혁명적 활동은 아니었고 처우개선을 요구하
는 외침으로 다만 노동운동사에 기록될 사건들이었다.
특히나 군산은 일본 자본주의 전파의 창구이면서 기독교 근본주의(구호 : 예수천국 불신지
옥) 선교사들을 조선에 유입시키는 통로이기도 했다. 이렇기에 군산은 전 세계에서 면적대
비 교회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는데, 그 다수가 근본주의에 뿌리를 두
고 있다. 그렇기에 군산지역 상당수 교회의 신앙은 ‘사회문제에 대한 성찰’, ‘생명에 존중의
식’, ‘주체의지’등은 찾아 볼 수 없고, 집단주의 감성을 바탕으로 지도자들에 대한 맹목적 믿
음과 복종이 난립한다. 이렇기에 군산에 새만금 사업과 핵폐기장 사업이 추진되던 당시, 기
독교연합회에서 사람을 모아 군산공설체육관에 수천 명을 모아놓고 (군산출신)장경동 목사
등을 불러서 ‘그것들이 유치되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들어 달라.’며 기도회를 했을
정도이다.
특히나 이러한 근본주의적 믿음은 자기 성찰능력을 거세하면서 ‘신의 대리인’들에게 자신을
내 맡기는 비주체적 모습을 파생시키는데, 강근호 전 군산시장이 군산 역 앞에 5천명의 시
민을 끌어 모아 ‘새만금 관제데모’를 했을 수 있던 것, 핵폐기장 유치 과정에서의 정치권과
기득권들의 바람몰이가 유독 잘 먹혀들었던 것은 그러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강근
호 군산시장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후 퇴진했다.
[2004년 새만금 궐기대회 시 풍경 / 당시 홀로 “정신 차리세요. 군산시민들.”이라는 피켓을
들고 온갖 수모를 당하며 찍은 사진.]
민주적으로 사안을 조율하려 하지 않고, 힘 있는 제왕적 존재가 군산을 좌지우지하는 극적
인 사례의 또 하나는 ‘강봉균 전 국회의원’의 경우였다. 정보통신부 장관, 재정경제부 장관
을 역임한 16대, 17대 민주당 국회의원 강봉균은 일단 받기만 하면 당선이 되는 민주당 ‘시
-도의원’ 공천권을 가진 ‘공천위원장’이 되어 군산지역의 시의원들을 주물럭거렸다. ‘핵폐기
장은 안전하고 좋은 것이다.’면서 읍면동을 돌아다니면서 의정보고회를 하고 다닐 때는 가
는 곳마다 시의원들이 얼굴마담을 하러 수행을 다녔다. 시의원들은 알아서 길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맘에 안 들면 공천권을 안주는데 어쩌랴? 그렇게 강의원이 시의원들을 길들여 놓
았던 이유는 국회의원 재선이나 도지사직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나만 믿
고 따르라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그러했느니라.’ 이것은 성경의 문장이면서 그 당시 강봉균
의원을 위시한 군산 정치판의 현실이기도 했다. ...(중략)...
사진과 함께 계속 보기 (주소창에 클릭해서 붙임.)-> http://j.mp/1fD16Zm
최근수정일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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