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국사 교과서 바로 잡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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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6.12.22
조회수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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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국사 교과서 바로 잡아주세요!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부여에 대하여
‘부여는 이미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가 3세기 말에 선비족의 침략을 받고,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사 교과서는 하북성 북부, 요녕성 북부, 내몽고, 동몽고, 동 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을 영역을 했던,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를 말살, 축소, 왜곡한 것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서기전 453~서기전221)의 지리위치, 각 지역의 특산물 등을 기록한 『사기』「화식열전」에는 연나라의 북쪽에 부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부터 존재한 국가가 틀림없습니다.
부여는 해모수왕이 건국한 북부여, 동명왕이 북부여 땅에 건국한 부여, 동명왕에게 북부여 땅을 빼앗긴 해부루왕이 동쪽 길림성 동부 연해주로 이동하여 가서 건국한 국가가 동부여,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 건국의 기초를 제공한 졸본부여, 백제 성왕이 538년에 국호를 백제에서 국호를 바꾼 남부여가 있습니다.
해부루왕의 조상이 해모수왕이니 해모수왕이 건국한 북부여가 가장 오래된 부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북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부터 존속해온 국가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1세기에 이미 왕호를 칭하고 교과서에 기록하고 있으니, 서기전 221년 이전의 인물인 해모수왕, 서기전 100년 전후의 인물인 동명왕과 해부루왕, 해부루왕의 아들인 금와왕은 왕으로 보이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연나라는 하북성 중부, 남부지방을 영토로 한 국가이므로 연나라 북쪽의 부여는 하북성 북부, 요녕성 서북부, 내몽고, 동몽고 지방에 있었고, 부여 북쪽에는 어떤 국가도 없었으므로 그 강역은 시베리아 동부지방에 까지 미쳤을 것입니다.
중국 전한(前漢:서기전 206~서기8년)에 황제와 제후왕들을 매장할 때 옥을 캐어 2498편의 옥편을 가공하고, 옥편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약 1100g의 금실로 꿰맨 옥의, 옥침, 신 등으로 만들어진 수의 즉, 옥갑(玉匣)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옥갑의 생산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므로 후한(後漢:25~220) 때에는 황제의 장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옥갑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다가, 위(魏:220~264)나라의 문제(:220~227)가 박장령을 내려 옥의 사용을 아예 금지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후한시대에 후한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이 옥갑을 후한의 황제가 미리 만들어서 부여와 가까운 현도군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부여의 왕이 서거하였다는 통보를 받을 때마다 부여왕의 장례식에 늦지 않도록 즉각 이 옥갑을 선물로 보내야 했다고 중국 위, 촉, 오의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여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대국이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이 옥갑의 조공문화로 미루어 볼 때 한나라에서는 해마다 막대한 량의 곡식, 금ㆍ은ㆍ보화ㆍ옷감 등을 부여에 선물(상납)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한나라를 침입하지 말라는 것, 고구려, 선비 등을 견제해 달라는 이유였겠지요.
중국의 조공을 받던 이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는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북부여ㆍ부여를 역사가 동부여의 역사로 왜곡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주몽은 서기전 58년에 태어났고, 서기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합니다. 대소왕자 등 7명의 금와왕 왕자들과 주몽이 함께 놀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금와왕은 최소한 서기전 주몽보다 20세 이상 나이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와왕은 서기전 78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고, 동부여의 해부루왕이 늙도록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 하느님(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와를 바위틈에서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부루왕은 최소한 금와왕 보다 40세 이상 나이가 많았을 것이므로 해부루왕은 최소한 서기전 118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해부루왕으로부터 북부여 땅을 빼앗아서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의 나이 또한 해부루왕과 비슷하였을 것입니다.
해모수왕은 서기전 221년 이전의 북부여의 왕이므로 해모수왕의 먼 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해부루왕, 동명왕, 금와왕, 대소왕자, 주몽은 해모수왕을 본적도 없을 것이고, 주몽이 동명왕이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해모수왕이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 주몽의 아버지인 것 같이 조작되고, 추모왕 주몽의 시호가 왜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인 것처럼 조작된 것일까요.
그것은 동부여 출신인 추모왕 주몽의 고구려를 건국한 국시가 북부여 땅을 되찾는 “다물”이었기에 동부여 출신이면서도 북부여 출신임을 표방하였고, 북부여의 옛 땅을 차지한 부여와 통일을 이룩한 494년 이후에는 부여와 통합을 이룩하기 위하여 추모왕 고주몽이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인 것처럼 조작한 것이다.
이는 고구려인과 부여인이 본래는 한 뿌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494년 부여와 고구려의 통일로 위기위식을 느낀 백제는 자신들이 부여의 정통임을 내외에 표방하기 위하여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백제의 시조가 부여의 동명왕이고, 부여의 위구대(태)왕이 백제를 건국한 것처럼 역사를 조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를 서기 22년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명망당하는 동부여로 조작 당함으로써 하북성 북부, 요녕성 북부, 내몽고, 동몽고, 동 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을 영역으로 하면서 중국의 조공을 받던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는 말살 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북경, 천진, 하북성 동부와 요녕성 서남부에 있던 요동군, 요서군, 현도군, 대방군, 낙랑군 등의 고토를 수복하고, 494년 부여를 통합한 고구려 영토는 천진, 북경, 하북성 북부, 요녕성 전체, 내몽고, 동몽고, 동 시베리아,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 연해주를 포함하는 대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하 동쪽의 작은 나라로 축소, 왜곡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해모수왕을 금와왕의 친구로 주몽의 아버지로, 유화부인의 정인으로 그리고, 해모수왕으로부터 주몽이 무술을 배우고, 대소왕자가 해모수를 살해한다는 드라마 “주몽”은 이러한 연구결과를 보지 못하고, 왜곡되어 온 역사를 근거로 만들어 진 것이 명백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알지 못한 많은 국민들에게까지 축소, 말살, 왜곡된 역사를 확대 재생산하여 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역사문화연구회(www.history.or.kr) 홈페이지에서 펀글입니다.
왜곡된 역사교육을 바로잡기 위한 1,000만인 서명운동을
참역사문화연구회에서 합니다.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역사문화적 자긍심을 되찾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 정착에 기어합시다.
서명하시는 곳은
참역사문화연구회의 홈페지인
www.history.or.kr
입니다.
참역사문화연구회의 홈페지인 www.history.or.kr 에 가시면 기막히고, 분노하고, 놀랄만한 연구결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기사들을 읽다보면 한국인으로서의 큰 자부심을 느끼실 겁니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부여에 대하여
‘부여는 이미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가 3세기 말에 선비족의 침략을 받고,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사 교과서는 하북성 북부, 요녕성 북부, 내몽고, 동몽고, 동 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을 영역을 했던,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를 말살, 축소, 왜곡한 것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서기전 453~서기전221)의 지리위치, 각 지역의 특산물 등을 기록한 『사기』「화식열전」에는 연나라의 북쪽에 부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부터 존재한 국가가 틀림없습니다.
부여는 해모수왕이 건국한 북부여, 동명왕이 북부여 땅에 건국한 부여, 동명왕에게 북부여 땅을 빼앗긴 해부루왕이 동쪽 길림성 동부 연해주로 이동하여 가서 건국한 국가가 동부여,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 건국의 기초를 제공한 졸본부여, 백제 성왕이 538년에 국호를 백제에서 국호를 바꾼 남부여가 있습니다.
해부루왕의 조상이 해모수왕이니 해모수왕이 건국한 북부여가 가장 오래된 부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북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부터 존속해온 국가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1세기에 이미 왕호를 칭하고 교과서에 기록하고 있으니, 서기전 221년 이전의 인물인 해모수왕, 서기전 100년 전후의 인물인 동명왕과 해부루왕, 해부루왕의 아들인 금와왕은 왕으로 보이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연나라는 하북성 중부, 남부지방을 영토로 한 국가이므로 연나라 북쪽의 부여는 하북성 북부, 요녕성 서북부, 내몽고, 동몽고 지방에 있었고, 부여 북쪽에는 어떤 국가도 없었으므로 그 강역은 시베리아 동부지방에 까지 미쳤을 것입니다.
중국 전한(前漢:서기전 206~서기8년)에 황제와 제후왕들을 매장할 때 옥을 캐어 2498편의 옥편을 가공하고, 옥편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약 1100g의 금실로 꿰맨 옥의, 옥침, 신 등으로 만들어진 수의 즉, 옥갑(玉匣)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옥갑의 생산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므로 후한(後漢:25~220) 때에는 황제의 장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옥갑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다가, 위(魏:220~264)나라의 문제(:220~227)가 박장령을 내려 옥의 사용을 아예 금지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후한시대에 후한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이 옥갑을 후한의 황제가 미리 만들어서 부여와 가까운 현도군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부여의 왕이 서거하였다는 통보를 받을 때마다 부여왕의 장례식에 늦지 않도록 즉각 이 옥갑을 선물로 보내야 했다고 중국 위, 촉, 오의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여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대국이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이 옥갑의 조공문화로 미루어 볼 때 한나라에서는 해마다 막대한 량의 곡식, 금ㆍ은ㆍ보화ㆍ옷감 등을 부여에 선물(상납)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한나라를 침입하지 말라는 것, 고구려, 선비 등을 견제해 달라는 이유였겠지요.
중국의 조공을 받던 이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는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북부여ㆍ부여를 역사가 동부여의 역사로 왜곡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주몽은 서기전 58년에 태어났고, 서기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합니다. 대소왕자 등 7명의 금와왕 왕자들과 주몽이 함께 놀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금와왕은 최소한 서기전 주몽보다 20세 이상 나이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와왕은 서기전 78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고, 동부여의 해부루왕이 늙도록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 하느님(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와를 바위틈에서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부루왕은 최소한 금와왕 보다 40세 이상 나이가 많았을 것이므로 해부루왕은 최소한 서기전 118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해부루왕으로부터 북부여 땅을 빼앗아서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의 나이 또한 해부루왕과 비슷하였을 것입니다.
해모수왕은 서기전 221년 이전의 북부여의 왕이므로 해모수왕의 먼 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해부루왕, 동명왕, 금와왕, 대소왕자, 주몽은 해모수왕을 본적도 없을 것이고, 주몽이 동명왕이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해모수왕이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 주몽의 아버지인 것 같이 조작되고, 추모왕 주몽의 시호가 왜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인 것처럼 조작된 것일까요.
그것은 동부여 출신인 추모왕 주몽의 고구려를 건국한 국시가 북부여 땅을 되찾는 “다물”이었기에 동부여 출신이면서도 북부여 출신임을 표방하였고, 북부여의 옛 땅을 차지한 부여와 통일을 이룩한 494년 이후에는 부여와 통합을 이룩하기 위하여 추모왕 고주몽이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인 것처럼 조작한 것이다.
이는 고구려인과 부여인이 본래는 한 뿌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494년 부여와 고구려의 통일로 위기위식을 느낀 백제는 자신들이 부여의 정통임을 내외에 표방하기 위하여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백제의 시조가 부여의 동명왕이고, 부여의 위구대(태)왕이 백제를 건국한 것처럼 역사를 조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를 서기 22년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명망당하는 동부여로 조작 당함으로써 하북성 북부, 요녕성 북부, 내몽고, 동몽고, 동 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을 영역으로 하면서 중국의 조공을 받던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는 말살 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북경, 천진, 하북성 동부와 요녕성 서남부에 있던 요동군, 요서군, 현도군, 대방군, 낙랑군 등의 고토를 수복하고, 494년 부여를 통합한 고구려 영토는 천진, 북경, 하북성 북부, 요녕성 전체, 내몽고, 동몽고, 동 시베리아,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 연해주를 포함하는 대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하 동쪽의 작은 나라로 축소, 왜곡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해모수왕을 금와왕의 친구로 주몽의 아버지로, 유화부인의 정인으로 그리고, 해모수왕으로부터 주몽이 무술을 배우고, 대소왕자가 해모수를 살해한다는 드라마 “주몽”은 이러한 연구결과를 보지 못하고, 왜곡되어 온 역사를 근거로 만들어 진 것이 명백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알지 못한 많은 국민들에게까지 축소, 말살, 왜곡된 역사를 확대 재생산하여 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역사문화연구회(www.history.or.kr) 홈페이지에서 펀글입니다.
왜곡된 역사교육을 바로잡기 위한 1,000만인 서명운동을
참역사문화연구회에서 합니다.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역사문화적 자긍심을 되찾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 정착에 기어합시다.
서명하시는 곳은
참역사문화연구회의 홈페지인
www.history.or.kr
입니다.
참역사문화연구회의 홈페지인 www.history.or.kr 에 가시면 기막히고, 분노하고, 놀랄만한 연구결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기사들을 읽다보면 한국인으로서의 큰 자부심을 느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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