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했던 일제의 핍박 속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듯,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대지에 어느덧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사들이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의 따스한 햇살 속에 이미 만개한 천리향, 잎을 재치고 먼저 연분홍빛의 자태를 드러낸 매화, 먼저 피려고 필사적으로 다투는 걸까 여기 저기 철쭉이 꽃망울을 맺었다. 봄이 오는 소리가 꽃향기에 몇올씩 섞여 온다.
우리의 주변에서 봄이 다가옴에 설레 일 때 89년 전 일본 땅에서 우리들의 순국선열들은 무엇을 하였을까?
순국선열들은 일제의 침략을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2.8독립선언은 1919년 당시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최팔용 등 600여명의 조선청년 독립단원들은 도쿄 기독교 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정신으로 일제의 불법 국권침탈에 대항해 우리의 민족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선언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보도 등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직접적으로는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했다는 보도를 접한 제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2.8 독립선언이다.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김도연,백관수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송계백을 국내로, 이광수를 상해로 파견한다.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 및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무자비한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이 이루어지고 실행위원 10명 등 27명의 유학생이 체포된다.
이와 같이 2.8독립선언의 발로가 없었다면 3.1운동도 없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 또한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한순간도 선열들의 피끓는 애국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달 말 새 정부가 출범한다. 경제 부강을 꿈꾸며 국민들이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에 앞서 국가의 소중함을 아는 건강한 사회, 정의와 도덕이 살아 숨 쉬는 사회가 먼저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반쪽의 나라를 온 쪽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이와 함께 경제부강의 정부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