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아무리 패기 넘치는 정열과 의지를 가진 영맨 이더라도 낯선 타지에서의 유학생활은 순탄치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젊은이의 꿈과 비전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내 나라 내 조국을 잃은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러햇으리라. 그래서인지 2.8독립선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이고 가슴 뭉클해진다.
주권 잃은 서러움에 대한 공감이자, 순수한 조국애에 대한 동감일 수 있다.
2.8독립선언은 6.10만세 운동, 광주 학생 운동 등 근대 학생 운동과 맥을 함께 하고 있지만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있는 실정인지금, 그래서 요즘 이를 기념하고 재평가해야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8 독립 선언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의 간접 영향을 받았다. 직접적으로는 1918년 12월 15일자에서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 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와, 12월 18일자에 파리 강화회의 및 국제 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민족 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된다고 하는 보도를 접하면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 운동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드디어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 및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유학생 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10명의 실행 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어 출판법위반의 실행을 언도 받는 것으로 끝났다.
2.8독립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보다 훨씬 강경하게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독립을 추구할 것이며 일본이 만일 정당한 방법으로 독립을 추구할 것이며 일본이 만일 정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혈전할 것을 선언하였다. 일제침략과 국권찬탈을 사기와 폭력에 의한 수치스러운 역사였다고 전제하고, 왜 한민족이 그동안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야 했는가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는 더 좋은 환경에서, 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며, 호연지기를 펼치고자 해외로 나가는 유학생이 많이 늘어가는 추세이다.
세계 유명한 대학에서 한국학생이 일등 하였다는 소식도 많이 들려온다. 타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당당하게 독립선언을 한, 그 위대한 모습을 보인 선조들에게서 진정한 한국인의 모습을 본 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