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올기쌀 먹었던 시절 추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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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7.09.29
조회수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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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촉촉 내리는 새벽이 되니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 물 소리가 가을비로써 예사롭지 않다, 멀리서 짖어 대는 삽살개 소리를 들으면서 이소리는 고향을 떠난 행여 내 친구들의 발자국 소리는 아닌가 생각을 해보았다, 물기 젖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새벽 닭 울음소리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나는 아침에 잘 아는 지인의 블로그 방금 이렇게 안부 글을 올려놓았다 .어수선한 추석 명절이 다지나가고 우리는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번 추석 명절에 모처럼 우리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지냈다 . 그간 대충 따 저 보니 세 아들들이 공부를 하느라고 서울로 ,인천으로, 집을 떠났었고 ,또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하거나 직장 때문에, 교회 일 때문에 , 우리 가족이 어릴 적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우리집 한자리에 모여 모든식구가 잠을 자고, 식사를 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 었 다 .그것도 귀여운 세명의 아들이 결혼하여 ,
우리 큰손자 상명이 와 상훈 이.큰 손녀 채 은 이. 초 연 이, 며 느 리 셋 그러니까 ,우리 12명 식구가 모이는 일이 쉬울 것도 같은데 잘 모여지지 않는다, 몇 해 전만 해도 명절이 되면,우리 내외와 아이들이 큰집에 모여 어른들께 세배를 하거나 차례를 지낼 때, 새벽부터 새 옷으로 챙겨 입고 제일먼저 종가집인 우리 큰집에 갔었는데 ,요지 음 은 그일이 엄두도 못내는 일이 되었다, 우리 식구가 큰집으로 가면 식사는 물론 대식구가 모인 자리라서,
엄두를 못내는 종가 집 형수님이 더 미안해서 이다. 우리 가족이 모이면 5대가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라서 참 대단하다 ,작년에는 kbs 에서 종가집 명절나기 취재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 차례를 기독교식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다른가정이 선정이 되기도 했었다 . 그 당시 리포터께서 흔한일이 아닌 우리 가족사를 아시고 취재를 시작한것이다 ,아마 이렇게 우리는 조상 때부터 서서히 살림이 자연이 분가를 하게 되고, 세대가 바뀌어 가는가 보다 ,
옛날에는 추석이 되면 논에 나가 아 직 덜 익은 나락을 세너 못 베어서 가마솥에다 넣고 삶아서 햇 볓 에 말려 방아를 찌면 쌀이 나오는데 이것을 올 기 쌀이라 하고 올기 쌀을 한주먹 웅 켜 쥐고 먹어보면 고소하고 딱딱해서 참 맛이 있 었 다, 보리밥만 해먹던 때라서 햇쌀뜬물 에 밥맛과 슝늉의 그 맛은 지금도 잃을 수 없는 추억의 밥맛이다 ,이 올기 쌀을 시골 아이들이 양복 주머니가 볼록 나오게 가지고 다니면서 자랑하면서 지금처럼 군것질거리가 없던 때라서 먹곤 했다 ,
어쩌다가 찹쌀로 송편을 쑥을 넣어 만들고 솔잎을 넣어 가마솥에 쩌 내면 금방 한판이 없어지는데. 이때는 누가 말리지도 않고 아이들에게 어서 많이 먹으라는 덕담을 나누었다, 이번 추석에는 지 경 장 에 가서 옛 친구들의 사랑이 그리워 시골 장터에 나가서 서성이던 할아버지 모습을 모니 .어깨동무를 기다리던 노인도. 바쁜 일정을 접어두고 찾아온 고향친구들도 ,이제 떠나간 것이다. 정거장이 없는 시골 개정 역전의 가로 등불도 초라한 간이역을 지키고 있지만 ,
이 비들기호가 다니는 개정간이 역전도 이제 언젠가는 군산역이 내흥동 금강하구 쪽으로 옮겨가면, 그 마저 희미한 가로등처럼 서서히 시들어 버린다는 생각을 하니 더 외로운 마음이 든다. 내가 사는 율북 리 는 고맙고 좋은 시골이다. 이 역전도 내가 어릴적에 군대에가는 형님을 마중하기위해 개정역에서 세워진 열차가 출발하여 꽁무니가 백마산 돌머리로 돌아갈때까지 .기적소리가 사라진기차를 바라보았고 ,일제 징용으로 떠나간 아들을마중하는 어머니들의 이별을 격은 개정 간이역이었다
시골 마을은 우선 주차하기도 좋고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이곳은 잘 피해간다 .멀리서 예전 쟁기를 짊어지고 논갈이 소를 몰던 충량마을 박 봉수씨 아저씨도 요지 음 은 통보이질 않는 다 . 논고랑 따라서 우 렁 잡던 순덕이도 멀리가고 ,복숭아 밭에서 설익은 복숭아를 속아내는 현경이 형도 돌아가신지 오래이다, 복사꽃 능금 꽃이 피던, 우리 집 화단에는 고창선운사에서, 많이 볼수있다는 상사화가 만발하였다 .
상사화는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한다 해서 상사화라 하는데, 요지 음 은 내가 카메라에 전혀 손이 안 간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컴퓨터에 권 태 가 생긴 모양이다 ,이번 추석명절에 나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 이 더 안타깝다 .먼저 제수씨가 돌아 가셨고. 동생이 건강을 잃어 현재는 임실 산골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 한 다 .일산에 있는 방사성 암 센 타 에서 췌장암으로 판정을 받았다 한 다 .제수씨는 유방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동생마저 아픔으로 고통을 받고 함께 낯선 임실 산골에 들어간 것이다 .
하루빨리 동생부부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원 한 다 ,건강은 건강 할적에 보호해야 하는데 우리가 살다 보면 모든 것이 그렇게 되질 않는 것이다. 잃어버린 고향을 두고 피난을 나온 친구들이 떠난 고향은 그래도 그 친구들이 .있을 때가 더 좋았다, 회현에서 살던 친구 경섭이가 과년 하고 예쁜 딸3명이 엄마하고, 이번 추석명절에 나를 만나고 서울로 갔다 .우리 노무현 대통령께서 북한 김 정일 주석을 만난다고 한 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통일이, 평화적 통일이 되려는 가보다 .지금 이시간은 보슬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 는 새벽이다
이번 추석 명절에 모처럼 우리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지냈다 . 그간 대충 따 저 보니 세 아들들이 공부를 하느라고 서울로 ,인천으로, 집을 떠났었고 ,또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하거나 직장 때문에, 교회 일 때문에 , 우리 가족이 어릴 적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우리집 한자리에 모여 모든식구가 잠을 자고, 식사를 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 었 다 .그것도 귀여운 세명의 아들이 결혼하여 ,
우리 큰손자 상명이 와 상훈 이.큰 손녀 채 은 이. 초 연 이, 며 느 리 셋 그러니까 ,우리 12명 식구가 모이는 일이 쉬울 것도 같은데 잘 모여지지 않는다, 몇 해 전만 해도 명절이 되면,우리 내외와 아이들이 큰집에 모여 어른들께 세배를 하거나 차례를 지낼 때, 새벽부터 새 옷으로 챙겨 입고 제일먼저 종가집인 우리 큰집에 갔었는데 ,요지 음 은 그일이 엄두도 못내는 일이 되었다, 우리 식구가 큰집으로 가면 식사는 물론 대식구가 모인 자리라서,
엄두를 못내는 종가 집 형수님이 더 미안해서 이다. 우리 가족이 모이면 5대가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라서 참 대단하다 ,작년에는 kbs 에서 종가집 명절나기 취재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 차례를 기독교식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다른가정이 선정이 되기도 했었다 . 그 당시 리포터께서 흔한일이 아닌 우리 가족사를 아시고 취재를 시작한것이다 ,아마 이렇게 우리는 조상 때부터 서서히 살림이 자연이 분가를 하게 되고, 세대가 바뀌어 가는가 보다 ,
옛날에는 추석이 되면 논에 나가 아 직 덜 익은 나락을 세너 못 베어서 가마솥에다 넣고 삶아서 햇 볓 에 말려 방아를 찌면 쌀이 나오는데 이것을 올 기 쌀이라 하고 올기 쌀을 한주먹 웅 켜 쥐고 먹어보면 고소하고 딱딱해서 참 맛이 있 었 다, 보리밥만 해먹던 때라서 햇쌀뜬물 에 밥맛과 슝늉의 그 맛은 지금도 잃을 수 없는 추억의 밥맛이다 ,이 올기 쌀을 시골 아이들이 양복 주머니가 볼록 나오게 가지고 다니면서 자랑하면서 지금처럼 군것질거리가 없던 때라서 먹곤 했다 ,
어쩌다가 찹쌀로 송편을 쑥을 넣어 만들고 솔잎을 넣어 가마솥에 쩌 내면 금방 한판이 없어지는데. 이때는 누가 말리지도 않고 아이들에게 어서 많이 먹으라는 덕담을 나누었다, 이번 추석에는 지 경 장 에 가서 옛 친구들의 사랑이 그리워 시골 장터에 나가서 서성이던 할아버지 모습을 모니 .어깨동무를 기다리던 노인도. 바쁜 일정을 접어두고 찾아온 고향친구들도 ,이제 떠나간 것이다. 정거장이 없는 시골 개정 역전의 가로 등불도 초라한 간이역을 지키고 있지만 ,
이 비들기호가 다니는 개정간이 역전도 이제 언젠가는 군산역이 내흥동 금강하구 쪽으로 옮겨가면, 그 마저 희미한 가로등처럼 서서히 시들어 버린다는 생각을 하니 더 외로운 마음이 든다. 내가 사는 율북 리 는 고맙고 좋은 시골이다. 이 역전도 내가 어릴적에 군대에가는 형님을 마중하기위해 개정역에서 세워진 열차가 출발하여 꽁무니가 백마산 돌머리로 돌아갈때까지 .기적소리가 사라진기차를 바라보았고 ,일제 징용으로 떠나간 아들을마중하는 어머니들의 이별을 격은 개정 간이역이었다
시골 마을은 우선 주차하기도 좋고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이곳은 잘 피해간다 .멀리서 예전 쟁기를 짊어지고 논갈이 소를 몰던 충량마을 박 봉수씨 아저씨도 요지 음 은 통보이질 않는 다 . 논고랑 따라서 우 렁 잡던 순덕이도 멀리가고 ,복숭아 밭에서 설익은 복숭아를 속아내는 현경이 형도 돌아가신지 오래이다, 복사꽃 능금 꽃이 피던, 우리 집 화단에는 고창선운사에서, 많이 볼수있다는 상사화가 만발하였다 .
상사화는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한다 해서 상사화라 하는데, 요지 음 은 내가 카메라에 전혀 손이 안 간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컴퓨터에 권 태 가 생긴 모양이다 ,이번 추석명절에 나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 이 더 안타깝다 .먼저 제수씨가 돌아 가셨고. 동생이 건강을 잃어 현재는 임실 산골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 한 다 .일산에 있는 방사성 암 센 타 에서 췌장암으로 판정을 받았다 한 다 .제수씨는 유방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동생마저 아픔으로 고통을 받고 함께 낯선 임실 산골에 들어간 것이다 .
하루빨리 동생부부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원 한 다 ,건강은 건강 할적에 보호해야 하는데 우리가 살다 보면 모든 것이 그렇게 되질 않는 것이다. 잃어버린 고향을 두고 피난을 나온 친구들이 떠난 고향은 그래도 그 친구들이 .있을 때가 더 좋았다, 회현에서 살던 친구 경섭이가 과년 하고 예쁜 딸3명이 엄마하고, 이번 추석명절에 나를 만나고 서울로 갔다 .우리 노무현 대통령께서 북한 김 정일 주석을 만난다고 한 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통일이, 평화적 통일이 되려는 가보다 .지금 이시간은 보슬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 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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