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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주 최후의 폭도들(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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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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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4.3 제주폭동 최후의 폭도들(상편) [시스템클럽] 글쓴이 : 비바람 작성일 : 2016-03-28 00:28 4.3 제주폭동 최후의 폭도들 1. 남로당 폭도들의 숫자 2. 폭도들의 융성기 3. 궤멸하는 폭도들 4. 6.25 초기의 폭도들 5. 6.25 말기의 폭도들 6. 최후의 폭도 5인방 7. 버림받은 남로당의 영웅들 1. 남로당 폭도들의 숫자 4.3폭동을 주도했던 남로당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무장 세력, 보조 세력, 동조 세력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무장 세력은 유격대, 인민해방군, 공비, 무장대 등으로 불리던 세력으로, 이들 무장 세력은 주로 산중에서 주거하며, 살인, 납치, 약탈, 방화에 앞장섰던 4.3폭동의 핵심 집단이다. 보조세력은 상황에 따라 주거지와 산중을 오가며 주거하면서, 무장 세력의 예비병력 역할과 함께 보급, 연락, 취사 등을 담당했다. 동조 세력은 마을 주거민으로서 폭동세력에 심적으로 동조하면서 폭동세력에게 식량과 의복, 자금 등을 자발적으로 후원하던 사람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4.3폭동을 주도했던 무장 세력은 얼마나 되었을까.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그들이 남긴 전투기록인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투쟁보고서)’에서 유격대의 세력을 조직 정비에 따라 240명에서 501명으로 적고 있다. 4.3정부보고서에도 ‘투쟁보고서’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실제 총기로 무장한 유격대는 120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무장대 숫자를 수천 명씩 기록한 기존의 자료들은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 9년 동안이나 4.3폭동을 지속했던 남로당 무장폭도들은 500명도 안 되었던 것일까. 이것 역시도 노무현 정부의 전형적인 4.3진상조사의 왜곡이다. 4.3정부보고서에는 남로당 폭도들을 ‘무장대’라는 이름으로 쓰고 있다. 무장대라는 표현은 진실을 은폐하는 이름이다. 흉기를 들고 살인했다면 살인범, 은행을 털었다면 은행 강도, 반란을 일으켰다면 반란군 등, 이름에는 그 실체가 들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장대라는 정체불명의 이름은 그 실체를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4.3중앙위원회는 최소한 두 가지의 목표를 가지고 ‘무장대’라는 용어를 동원했다. 첫째는 4.3폭동 주도세력의 본질인 반란군, 폭도라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4.3폭동 주도세력의 숫자를 ‘무장 세력’에 국한시키기 위함이다. 무장대라고 씀으로서 4.3폭동의 주도세력 숫자를 무장 세력 숫자인 500명 이하로 줄일 수 있었고, 정부보고서에도 그렇게 쓸 수 있었다. 무장대라는 용어는 노무현 정부의 4.3중앙위원회를 최고로 만족시키는 이름이었다. 대한민국 군경에 의한 피해는 침소봉대하고, 남로당 폭도들은 왜곡축소 시켜주는 이름, 그래서 4.3중앙위원회는 수 천 명이 안 되는 4.3사망자는 3만 명으로 부풀리고, 수천 명이 넘는 4.3폭동의 폭도들은 500명 이하로 왜곡할 수 있었다. ‘브라운 대령 보고서’는 1948년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40일간 도내 각 정보기관 에서 제주도민 약 5,000명을 심문한 결과를 종합하여 얻어진 정보 보고서다. 브라운 대령 보고서는 현존하는 당시 4.3문서 중에 가장 높은 신빙성을 가진 문서이다. 이 문서에서는 4.3폭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인민해방군의 군대는 약 4천 명의 장교와 사병을 보유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4.3폭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다가 일본으로 도망간 김봉현은 그의 저서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인민유격대의 세력을 “한 때는 무장력이 3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 반란’에는 “반란군의 주력은 500명 정도였고, 그들이 하산하자 3,000명의 주민들이 이에 가세했다”고 쓰고 있다. 제주4.3에 관한 저서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춘 신상준의 저서 ‘제주도4.3사건’에서는 핵심적 무장 세력인 인민유격대 이외에 부락 자위대를 비롯한 후방 지원세력이 전성기인 1948년 4월에서 9월 사이에 3천~5천 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다. 4.3정부보고서에서 4.3폭동의 남로당 폭도들을 ‘무장대’로 표현하고, 이 500명 이하의 무장대가 4.3폭동 주도세력의 전부인 것처럼 표현한 것은 4.3의 진실을 은폐하는 최대의 왜곡이다. 500명도 안 되는 무장대가 만 9년 동안이나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게 하고,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게 만들었다는 것은 4.3중앙위원회가 만들어낸 희대의 소설이다. 4.3중앙위원회는 500명이라는 무장 세력의 배후에 도사린 4.3폭동의 거대한 세력을 은폐한 것이다. 그 세력은 보조 세력과 동조 세력을 포함하여 수천 명이 넘었고, 이들이 배후에 버티고 있어서 4.3폭동은 장기전이 될 수 있었다. 2. 폭도들의 융성기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도의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은 일제히 경찰지서 12군데를 기습하면서 4.3은 발발했다. 그리고 4월 10일 남로당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해방군의 이름을 내걸고 극악 반동분자는 엄벌에 처하며, 인민해방군에 적극 협력하라는 요구와 함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투쟁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경찰관을 살해하는 데에는 보상금이 걸려 있었다. 경찰을 살해하는 폭도에게는 순경 1인당 1만 원을, 경사 1인당 1만5천원을, 경위급 이상 1인당 2만 원이 지급되었다. 폭동에 사용된 칼들은 전라남도의 민주애국청년동맹에서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폭동을 진압해야 할 9연대는 제주인민해방군에 호의적이었고, 국방경비대 김익렬 9연대장은 인민해방군 사령관 김달삼과 접촉에 나서면서 혼란을 키웠다. 김익렬 연대장이 진압에 미온적 입장을 취한 것은 결정적으로 인민해방군에 시간을 벌어줬고,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월 10일 제헌선거는 제주인민해방군에 의해 파탄을 맞았다. 4.3폭동은 바로 5월 10일 실시되는 대한민국 제헌의회 선거를 방해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5월 10일이 다가오면서 제주도는 폭동 당일보다 더한 지옥으로 변모했다. 선거관리위원이나 동조자에 대하여 남로당의 살인협박과 테러가 횡행했고, 투표소가 습격당했다. 협박에 견디다 못한 선거관리위원들이 마을에서 피신하거나 사퇴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선거 당일에는 폭도들이 아예 마을주민 전체를 산으로 끌고 가버려 선거가 불가능한 마을들이 나타났고, 선거가 진행되는 마을에는 폭도들이 들이닥쳐 투표소를 불태우고 선거관리 인사들을 마구 살해했다. 북제주군 관내 133개소 투표소 절반 이상이 선거인명부를 탈취당하거나 불에 탔다. 선거 당일에만 선거관리위원 15명이 살해되었고, 5명이 중상을 입었다. 피의 5월 10일이었다. 제헌선거가 불발된 곳은 전국에서 제주도가 유일했다. 제주도 3개 선거구에서 2개 선거구는 1년 뒤에야 정상적인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진압군 측에서는 5월 6일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박진경 중령을 9연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진용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9연대가 상황파악 부족과 부대 정비 사정 등으로 인하여 본격적인 진압에 나서지 못했다. 5월 20일에는 진압에 불만을 가졌던 남로당 병사들이 대규모 탈영하여 폭도 측에 가담하는 일이 벌어졌다. 비로소 폭동 진압에 대한 전적인 임무가 경비대에 맡겨졌다. 진압군이 진압다운 진압에 나섰던 것은 5월 22일부터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경진압에 불만을 가졌던 9연대 내의 남로당 프락치 병사들이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6월 18일 승진 축하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취침 중인 박진경 연대장은 그의 부하들에게 총을 맞았다. 체포된 범인들은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되었다. 7월에 접어들면서 폭동은 약간의 소강상태를 맞았다. 남로당에서 지하선거에 나섰기 때문이다. 지하선거란 북조선 정권을 수립하는 남한대표 대의원을 비밀리에 뽑는 선거였다. 남로당에서는 야간에 가가호호 방문을 하여 백지에 서명을 받거나 손도장을 받기도 했지만, 대낮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단체로 서명을 받는 일도 있었다. 8월초 제주인민해방군 1대 사령관 김달삼이 월북할 때 싸들고 간 지하선거 투표용지는 모두 52,350명분이었다. 제주에서는 모두 6명이 북한의 대의원으로 참석했고, 김달삼은 주석단 일원으로 뽑혔다. 대한민국 건국 선거에는 폭동으로 반대하는 모습과, 북조선 수립 선거는 지하선거까지 하면서 열렬히 지지하는 두 개의 모습이야말로 제주4.3의 정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9월 9일이 북조선 정권이 수립되었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설 조짐이 보이자 힘을 받은 제주도의 공산주의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9월 초부터 다시 폭도들의 습격이 재개되었고, 제주도에는 인공기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갓 탄생된 정부에서도 4.3을 심각하게 보기 시작했다. 4.3은 폭동을 넘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반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9월초부터 제주도로 응원군이 증파되기 시작했다. 2대 사령관 이덕구 체제로 정비한 폭도들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4.3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삐라가 곳곳에 나부끼고,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경찰과 우익인사들이 곳곳에서 피살당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진압을 위해 제주도로 진압 파견명령을 받은 경비대 14연대가 제주도로 출발하기 직전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이 격발되는 순간이었다. 제주4.3폭동과 여순반란사건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연속하여 발생한 공산주의 사건으로, 이 두 개의 사건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에 반공이라는 DNA를 깊숙이 새겨 넣었다. 11월부터 강경진압이 전개되었다. 바야흐로 제주도의 ‘잔인한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 지역에 주민 소개령이 내려졌다. 소개령을 거부하는 마을에서는 잔존주민이 폭도 간주되어 즉결처분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주인민해방군은 4.3폭동 초기에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무기탈취, 탈영병 가세 등으로 화력이 급증하여 경기관총, 중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할 정도였다. 북한 정권의 수립으로 사기가 오른 제주인민해방군은 대한민국 정규군과 대등할 정도의 전투를 벌였고, 매복전과 기습으로 경비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심지어 정규군 1개 중대를 전멸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에 들어서면서 제주인민해방군은 주요한 몇 개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맛봄으로서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1949년 1월 12일 의귀리 전투에서 제주인민해방군은 96명이 사살되고 14명이 생포되었다. 2월 16일 남원 전투에서는 160여 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3월말에는 경비대 4개 대대가 동원되어 대규모 수색전 벌이다가 녹하악오름 근처에서 이덕구가 진두지휘하는 1천여 명의 제주인민해방군과 조우했다. 유격대 178명이 사살된 녹하악 전투는 제주인민해방군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이 전투 이후 제주인민해방군은 다시는 경비대를 상대로 대규모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제주인민해방군은 소규모 부대로 분산되어 흩어졌고, 이후 경비대는 소탕전과 귀순공작을 적절히 혼합하는 작전을 펼치면서 폭도들의 주력부대는 와해의 길을 걸었다. 보충자료 ● 1대 사령관 김달삼(金達三, 1924~1950, 본명 이승진․李承晉, 대정면 영락리)  ● 2대 사령관 이덕구(李德九, 1920~1949, 조천면 신촌리) ● 3대 사령관 김의봉(金義奉, 1924~1953, 조천면 와흘리) ● 4대 사령관 고승옥(高升鈺, ?~1950, 대정면 보성리) ● 5대 사령관 허영삼(許永三, 일명 許丁根, 1926~1952 안덕면 상창리) ● 6대 사령관 김성규(金成奎, 1921~1957, 중문면 색달리) ● 최후지휘관 정권수(鄭權洙, 1918~1956, 구좌면 상도리) 자료정리(2016-11-30) 대한해외참전전우회 창원시지회 사무국장 겸, 보훈지킴이 창원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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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수정일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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