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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장인어른께서 사위에게 흘리신 마지막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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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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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께서 흘리신 마지막 눈물

들길 따라 물길 따라 가난한 농부로 살아오신 우리 장인어른께서, 지난 2010년 11월 27일 오후 4시30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아버지가 떠나시던 날 마침 분당송은 요양원에 서둘러 가게 되었는데, 내가 오기만 기다리신 것처럼 나를 무척 반가워하시고 반기셨다 의식이 있으셨고 기운이 없으신지 무슨 말씀을 드리면 알았다고 하는 신호로 눈을 움직이셨다. 상태가 평소처럼 별로 위중하시진 않은 것처럼 보여, 하마 트려면 이 세상을 떠나시는 마지막 임종을 못 뵐 뻔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마지막 임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어른들께서 말씀하신 그 이야기가 실감이 났다

그날 큰 처남이 아버지 상태가 여전하시니 매형과 누나들은, 내일 주말 바쁜 일정이 있으니 연락드릴 테니 염려 말고 어서 내려가라는 말에 군산으로 돌아 나오려고 했는데, 원장님께 물었더니, 다시 환자를 점검하던, 맥박과 혈압이 안 좋아 보인다는 원장님 말에, 우리는 잠시 더 머물고 있다가, 의사 선생님께서 임종 준비하라는 말이 있어, 마지막 흘리시는 그 눈물을 내 손으로 닦아 드렸다

평생을 가난하게 농부로 자식들을 위해서 살아오신 어른이시기에 슬픔의 눈물이 나왔고, 보잘것없는 나를 사위로 맞아주시던 그날 밤일이 생각이 나서 오늘 이글을 써본다. 내가 장인어른을 처음 만나 뵌 건 첫눈이 내리는 어느 해 초겨울날이었다. 저녁상을 물리치시고, 초가을부터 벼농사를 마친 후 처가 에서는 장모님과 딸들이 벼 보관용 가마니를 치던 방으로 내가 안내되어 큰 인사를 드렸더니, 장인어른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고 기침만 하셨다,

그때 가슴을 졸이고 있던, 나에게 어디서 사느냐고 말씀하신 후, 아버님은 방문을 열고 나가셨고, 장모님께서는 손에 홍시 감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셔서, 남의 집 귀한 아들에게 함부로 하신 다 하시면서 나를 맞아주셨다. 농사 800평을 지으시면서 딸 여섯에 아들 둘 8남매를 키우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생각해 본다.

자식들이 먹을 양식이라고, 직접 지은 논에 농약을 안 해서 해마다 소출이 남보다 적게 났고 나락이 쭈그렁이 농사한다고 조롱을 받더라도, 우리 아들이 먹을 농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 하시면서 늘 웃으셨다 한다, 딸 여섯을 낳고 오랜만에 처음 얻은 아들 완석이가 태어났을 적에 너는 명이 길어야 해 하면서, 양발로 싸서 탯줄에 감고 이빨로 끊으실 정도로 좋아하셨다는데, 아버님은 자신을 돌보시지 않고 살아오신, 그동안 생활 중 아버님은 7년간이나 중풍으로 고생하신 장모님 대소변을 받아내시면서 병시중을 해주셨고,

늘 어머니 병상 머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느 어머니 고상 참 많이 혔 다, 그렁게 느덜이 더 잘 혀라! 하시면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최선으로 잘해 드리고 싶어 하셨고 마지막 장모님께서 세상을 운명하실 적에, 더는 주사도 놓지 말고 그냥 편하게 어서 가도록 놓아두라 하셨던, 당신이 역시 분당 재생병원에서 치료를 다 마치신 후, 나는 틀렸으니까 그냥 가만히 둬 달라 부탁하시면서 퇴원을 재촉하셨고, 그간 분당 송은요양원에서 요양하시다가 운명하셨다.

귀뚜라미가 울던 개정면 아산리 엉청굴 우리 처가는 장독대가 있었고, 그곳에선 방안에서 창문만 열면 달그림자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무에 걸쳐진 둥근 달이 보였고. 봄이면 아카시아 나무에 꽃이 사방에 피고, 산새들이 모여든 곳이다, 해마다 깨 쭉 나뭇잎이 발갛게 피는 초봄에는 자전거에 사위가 좋아한다 하시면서 우리 집에 가져갈 깻쭉잎을 장모님께서 따서 두시면 가만히 자전거 뒤에 매달고 새벽에 집에 찾아오셔서 야 아직 안 일어났느냐! 하시면서 대문을 열고 오시곤 들어오셔서, 야! 소주 있으면 한잔 먹자 말씀하시면 아내는 아버지께 해장 술국 만들어 드릴게요 하면, 아버지께서는 그래랴! 하시면서 무척 아내를 예뻐하셨고 사랑하셨다

내가 너를 잘 가르키 기만했으면 네가 잘됐을 큰 사람인데 아깝다 하시면서, 아내에게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 시킨 평생 죄인처럼 말씀하시면,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면서, 아버지 괜찮아요 하면서 아버지를 위로 해 드렸고, 당시에 농촌에서 여덟 자녀를 키우고, 다들 공부시키고 생활할 형편과 여유가 하나도 없이 살아오신 장인 어르신 일생을 알 수 있다,

올해 봄 그러니까 4월 중순에 마지막으로 군산에 오신 아버님을 모시고 늘 좋아하시는 생선 매운 탕을 나와 함께 아내가 대접해 드리고, 자동차로 군산항 부잔교 근처에 함께 하셨을 적에, 야! 내가 발산 시마타니 농장에서 여기까지 지게로 나락 한 가마니를 지고, 사쟁이에서 한번 쉬고 여기까지 왔어, 그때 힘 약한 사람들은 얼씬도 못 혔 어, 시방인 게 그러지 그렁 게! 나도심이 좋았지 그때 어깨 품 팔아서 가용 돈 많이 썼 당 게! 하시면서, 무용담을 하시듯 말씀하셨다,

어느 곳이던지 무수히 피는 꽃 개 망초 꽃을 좋아하는 내 아내 유정은 말이없는 효심으로 늘 장인어른에게서 한시도 눈을 튀지 않게 살피면서 수많은 사랑을 아버지한테 늘 많이 받아왔다. 늘 온화하시면서도 엄격하셨던, 아버님은 내 고향 군산에 비릿한 갯냄새가 절여진 그 땅 나는 그곳에 한 번 더 가고 싶다 하셨다 한다, 병환이 깊으신 중에 고향 처가 옛터를 그리워하고, 송원요양원 간호인도 붙들고 고향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렇게도 고향에 다시 한 번 더 오시고 싶어 하셨던 우리 아버님은 요양원장님이 늘 병환 중에 계신 아버님의 침상을 돌보시면, 병환 중이 시라도 항상 온화한 말씀을 많이 하셔서, 아버님 저 두 아버님 딸이 되고 싶어 요 하면, 아이고! 내가 힘 떨어져서 이제 그렇게 못 해 그렁게! 다 성장했으니 마음대로 더 멋지게 살아 하시면서 농담을 하셨고, 교훈 될 좋은 말씀만 하셨다고 안타까워했다,

운명하시고 난 다음, 여러 간호인들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았고, 세상을 떠나시는 그 자리에서 아버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그동안 정말 사시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고 아들, 손자, 며느리. 모두에게 온갖 노력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잘 길러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더는 아무 미련은 두시지 말고 편한 히 하늘나라에서 천사가 내려와 아버지 모시고 갈 적에, 그 손 꼭 붙들고 천국으로 가시면 돼요, 그 손 붙들고 가시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신 어머니를 만나 뵐 것이에요 하면서 말씀을 드렸더니 마지막 눈물을 흘리셨다, 그 눈물을 내 손으로 닦아 드렸고, 잠시 후 가뿐 숨 을 몰 아 쉬시는, 아버님을 더 어떻게 해드릴수가 없어 손만 꼭 잡아 드렸다,

자식 된 도리로 생각해보면 참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이었다. 평생을 자식들 위해서 살아오신 우리 아버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던 날, 나는 교회 대표기도 순서라서 혼자서.서울에서그날 잠간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그토록 아들을 기다리시면서 여섯 딸을 낳으신 후 두 아들을 두셨던 그 아들이 온갖노력을 해서 아버님을 효성으로 모셨지만, 막상 당신에 많이 아 프 실적엔 우리가 곁에 없었다,불효자인셈이다

장모님을 7년 동안 대소변을 받아 내시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살아오신 아버지는 어머니가 세상 떠나신 그날, 그간 사니 라고 욕봤어 하시면서 눈물조차 안 보이시던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시니 너무 불쌍해서, 내가 군산에 간 그 사이에 당신의 사랑하는 넷째 딸 유정이가 속 시원하게 한번 울었답니다, 자상한 아내는 언제나 아버지가 세상에서는 제일이었고 아버님 말씀만 해도 늘 긴장하면서 평소에 자식 된 도리를 다하려고 했어요,

넷째 딸을 걱정하셨던 그 마음 알 것 같아요, 영리한데 많이 가리키지 못함을 미안해하셨다는 처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지막까지 자식을 그렇게 인정해주셨다는 기쁨으로 고마움을 더 느낀 겁니다, 이렇게 생애의 마지막까지 자식들 하나하나까지의 세심한 배려를 아끼시지 않았던 우리아버지가 떠나신 그날 밤하늘을 바라보니, 안 계신 그 공간이 너무 크다는 걸 느낄 수 가 있어 요.

내가 더 어딘지 허전하고 어딘지 쓸쓸하고 불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마음에 뻥 뚫린 이 공간을 그 어떤 것으로도 메 꿔지지 않을 것이다, 남들보다 아버지가 많이 배워서 그 지식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간 살아오시면서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무한대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이 무엇인지? 그러한 사랑을 주셨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요

아버지가 세상를 떠나시고 난후 그 빈 공간은, 이제는 내가 아내와 처남들과 함께 메우면 서 살아야 겠죠, 아버지께서는 꽃을 좋아하셔서 늘 장독대 옆에 봉숭아꽃과 과꽃을 심으셨고, 가을이면 딸들에겐 봉숭아 물을 손끝에 들이게 하셨던, 그 정성, 해마다 마당에 심은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홍시감을 따주시던 그 일. 상수리나무에서 상수리가 우수수 떨어지던 그것을 잘 모아 두셨다가 상수리 묵을 만들어 주셨던 추억, 사위들에 겨울에 집에오면 잡아주시던 씨암닭.따뜻한 장작불을 때시고 기다리면서 아랫목에 담가두셨던 청국장.

그 정성과 고마움이 가슴이 미어지도록 가고 싶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속으로 돌아가 누군가를 붙들고 울고 싶은 옛 임 이 되어버린 우리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보고 파지는 이 새벽이다, 창호지 문지방이 너 떨 거리면서 북풍이 들어오던 처가집 창문이 그립고, 가을바람 속에 울어주던 스르라미 소리가 가슴이 더 메어진 다, 그림자처럼 늘 내 곁에서 슬픔과 기쁨을 나눠 주시면서 잘했다 욕봤다 하시면서 격려를 많이 해주신 우리 장인어른 얼굴이 너무나 보고 싶은 새벽이다, 다정스런 기침으로 첫 나와의 만남을 말씀 해주시던 그 대답을 나는 오늘도 기억하고 싶고,사랑하는 우리 아버님이 하나님 품에서 두고가신 당신의 아들 둘, 딸여섯이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천국에서다시만날 그날까지 안녕히 계세요.... 잊지않고 위로해주신 여려분고맙습니다 불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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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수정일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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