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군산시립교향악단
작성일22.05.17
조회수484
v. 쇼팽 피아노협주곡 2번
쇼팽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바단조 작품 21번은 1829년 가을에 쓰기 시작하여 그해 겨울 완성되어 바르샤바에서 1830년 3월 17일에 작곡가의 연주로 성황리에 초연된다.
그해 여름 쇼팽은 그의 두번째 협주곡 마단조 작품 11번을 완성했고 1830년 10월11일 바르샤바에서 그의 고별 콘서트에 연주되었다. 그가 조국을 떠나기 한달 전이었다.
그는 비엔나, 뮌헨, 그리고 슈투트가르트를 거쳐 1831년 가을, 그는 짐가방에 출판을 기다리는 여러개의 작품들을 가지고 파리에 도착한다. 그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중요한 사람들과 인맥을 쌓아가는 동안 – 그것은 작곡자에게 있어 쉽지않은 시간이다 – 여러 출판업자들로부터 주문을 받으며 혼란스러운 시간을 가진다. (쇼팽자신은, 작곡된 순서에 따라 항상 그의 마단조 협주곡을 2번이라 명하였다.- 현재는 1번으로 출판됨*) 작품 11번은 1833년, 작품 21번은 1836년에 출판되었다. 발견된 소피아 리사의 기사글에 의하면 “쇼팽은 현대출판유통업계의 빛줄기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진보적추측일수도 있다.)
쇼팽이 파리에 도착한 1831년의 가을, 그는 두 협주곡 포함하여 많은 완성된 작품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출판업자들과 거래의 경험이 적었던것으로 보인다. 1832 연초에 그는 상업가인 아리스티드 페렌츠와 연결되어 그의 두 협주곡 출판을 의탁한다. 그러나 그 해 가을에 페렌츠의 작은 기업은 어려움을 겪었던것이 분명하다. 이로 인해 쇼팽은 파리의 실정에대해 더욱 익숙해졌을 것이고 잘알려진 출판업자인 마우리체 슐레징어에게 그의 작품들은 보호를 받으며 출판권을 넘기게 되었다.
높은 매출액에 대해 알려져있는 슐레징어는 쇼팽의 오케스트라 작품들보다 피아노 독주를 위한 작품에 더욱 관심이 많았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출판사에서는 오직 한 곡의 협주곡만을 출판하는 것으로 한계를 정하려는 듯 했다. 이러한 계획은 이전에 페렌츠와 가졌던 거래내용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래서 쇼팽의 두번째로 쓰여진 이 한살박이 협주곡 마단조는 출판목록에 협주곡 1번이라 인쇄되었다. 이렇게 1번이라 결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마단조 협주곡이 두 협주곡 중에 작곡된 최근의 것이라서 그런것인가? 아니면 바단조 협주곡을 쇼팽이 이미 파리에서 2월달에 연주했기 때문에 출판업자들이 출판되지 않은 바단조 협주곡을 보호하기 위해 마단조를 1번이라 명한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채로 남아있다.
바단조 협주곡은 마단조 협주곡과 원재료 자체와 관련해서 다른점을 보인다. 이는“준총보”semi-autograph로 불리는데 즉 쇼팽의 오케스트라 총보작업에 손을 대지 않은 상태의 피아노파트 악보이다. 이 곡의 첫마디에서 마지막마디가 쓰여지는 동안 그 피아노 파트가 오케스트라 부분도 연주하게끔 구성되어있는데 이는 악보에서 피아노가 잠시 쉬는 부분이다. 따라서 전체곡은 반주부가 없이 연주될 수 있으며 말하는 방식이 소나타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역사적으로 볼때 아베 보글러라는 사람과 연계되어있는데 그는 작곡가들이 그들의 협주곡을 쓸때 그들 자신이 “소나타”처럼 오케스트라가 없이 연주할 수 있게 만들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또한 바로크시대에 독주자가 기악 협주곡을 연습할 때 오케스트라 파트부에 조인하여 튜티tutti 부분을 연주할 수 있도록 옵션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초반의 수십년간은 이러한 피아노 리덕션(솔리스트 혼자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악보 - 요즘은 두대의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도록 재구성된것이 일반적이다*)과 오케스트라 파트보와 함께 출판되는 관행이 유지되어왔다. (이 악보는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의 총 연습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몇년이 지난 이 악보들은 자주 문제를 일으키곤 했는데 마단조의 콘체르토도 예외는 없었다. 음악 출판사들은 솔로 파트와 피아노 혼자 오케스트라 간주부를 포함한 모든것을 연주하게 되어있는 리덕션(축소판)을 뒤죽박죽 섞어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원전판 편집자들에 대한 정면 대결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가지고 있는 총보를 다시 재구성하는것 보다 오케스트라 파트를 리덕션한 피아노 파트가 더 원전판에 가깝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아무튼 수정작업이 복잡했기때문) 이것이 암시하고 있는것에 주목해보면, 이 독립적인 오케스트라부는 - 즉, 독주자가 쉬고있는 부분들을 지칭한다 - 쇼팽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피아노 리덕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단조의 협주곡과 함께 분실되었던 오케스트라 반주부의 리덕션에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제시해준 이 행운의 자료에 감사한다. 한나 브로블류스카-스트라우스의, "쇼팽연구" Chopin Studies (바르샤바 1990)에서 쇼팽의 비서였던 율리안 폰타나에 의해 편곡된 이 협주곡의 2,3악장이 존재하는 가에대한 여부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작곡자인 쇼팽의 부탁에 의한 것이었고, 이것이 성급한 작업이라 할지라도 작곡자 자신이 만든 것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 자료가 허가하지 않은 이 편집본의 일부는 1악장의 오케스트라 반주부를 피아노로 리덕션 하여 1860년대에 브라이트코프 & 해르텔(출판업자)에 의해 출판되었다.
v.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
이 교향곡은 원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는 것을 의도로 했던, 베토벤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베토벤의 무급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의 회고록에 의하면, 유럽의 "해방자"를 기리기 위한 그 아이디어는 1798년 빈에 파견된 프랑스 특사 장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또는 베르나도트의 측근으로서 방문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의 헌정자 루돌프 크로이처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에 따르면, 그 아이디어는 작곡가 자신의 것이었다. 리스의 설명처럼 베토벤은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집정관처럼 나폴레옹에 대해 높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1804년 초 악보를 완성했을 때 그는 표지에 Buonaparte ("보나파르트")라고 썼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원고를 탁자 위에 자랑스럽게 올려놓았다. 보나파르트는 베토벤과 단 1년 차이인, 같은 동시대 사람으로서 베토벤의 감탄을 자아낸 인물이었다. 베토벤은 거의 의식적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운명 사이에서 수평 관계를 확립하려고 했으며, 보나파르트의 모습으로 구현된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감탄했다.
베토벤은 빠르면 1789년에 영웅주의의 교향곡을 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펜을 들지는 않았다. 베토벤은 1801년 자신의 청각 장애를 인식하고 난 후 그 해 여름 빈 기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베토벤은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썼다. 그는 유서에서 심지어 "자살까지도 생각했지만, 예술만이 나를 붙잡았다"고 표현했다. 그는 이 단계에서 내면의 투쟁을 선언했고 교향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교향곡의 작곡은 공식적으로 1803년 5월에 시작되었고 1804년 초에 완료되었다. 주된 작업 시기는 베토벤이 바덴바이빈과 되블링에서 보내던 1803년 여름(6월/10월) 즈음이다.
열람하신 정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