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시립교향악단
작성일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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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만의 표현으로 극대화된 환상 서곡<로미오와 줄리엣>
차이콥스키는 바이런, 단테, 셰익스피어 등 많은 문학작품을 탐독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여 그의 작품을 배경으로 한 〈햄릿〉, 〈프란체스카다 라미니〉, 〈템페스트〉, 〈만프래드〉, 〈로미오와 줄리엣〉 등 7곡이나 썼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용적으로 충실하고 완성도가 높은 걸작이 바로 환상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차이콥스키는 베를리오즈에게 영향을 받아 1867년 〈폭풍우〉를 완성한 후 그 다음 해에 발라키레프와 국민파 음악가들과도 알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무소륵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있었다.
화창한 1869년 5월 어느 날, 그는 발라키레프와 초록빛 가득한 전나무 숲 속을 산책하면서, 발라키레프로부터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작곡할 것을 권유받는다. 당시 함께 있었던 차이콥스키의 전기 작가이자 친구인 카슈킨은 다음과 같이 그때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차이콥스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발라키레프는 자신이 암시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가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미 발라키레프도 이 주제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이미 완성된 음악인 듯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 구성을 설명해 나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차이콥스키는 환상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수개월간 숙고를 거듭한 차이콥스키는 그해 9월부터 11월 사이 환상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완성하고 그 이듬해 3월 은인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초연하게 된다. 그러나 초연의 평은 그리 좋질 않았고 차이콥스키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친 후 11년이 지난 1881년, 마지막 손질을 마친 최종판을 출판하게 된다.
그 이후 차이콥스키는 국민파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냈는데, 차이콥스키는 발라키레프의 국민파와는 달리 루빈스타인이 설립한 음악원에서 전문적으로 수학한 음악가로서 그의 작품은 이미 서구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이콥스키는 순수음악이 아닌 표제음악 성격이 강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 주제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분위기를 선율로 나타낸 다음 그것을 좀 더 확대된 음향으로 증폭하여 그 표제성을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표출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차이콥스키만의 특성이고 매력인 것이다.
차이콥스키는 이 서곡에서 비극적인 아름다운 사랑의 주제를 바탕으로 장중하고 숭고하게 종교적인 색을 입히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 전기 작가 쿠닌은 “만약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이 없었다면 1870년대 차이콥스키의 표제적이고 교향적인 작품은 물론이고 만년의 웅장한 교향곡도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차이코프스키 전기에서 평하고 있다.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크게 4부분으로 나눠진다.
△제1부 서주는 느리고 장중하게 시작하면서 극중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사 로렌스를 그리고 있다.
△제2부 서로 원수지간인 베로나의 몬테규가와 캐플렛가의 주제가 거칠고 격앙된 화성으로 폭발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결투의 장면으로 번진 후 △제3부 소란이 진정되면서 몬테규가의 로미오와 캐플렛가의 줄리엣의 청순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테마가 잉글리시 호른과 비올라의 우아하고 서정적인 선율로 흐른다. 이 테마를 두고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의 모든 음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테마”라고 극찬했다. 이어 사랑과 증오의 테마가 서로 얽히면서 비극적인 색채가 점점 짙게 깔리면서 차이콥스키 특유의 독특한 색채로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된다.
△제4부 수도사 로렌스의 조언대로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있는 로미오를 보고 그가 죽은 것으로 알고 로미오를 따라가기 위해 독약을 마시며 자살을 하게 되는 줄리엣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랑의 테마가 숭고하고 애절한 하프의 분산화음으로 은은하고 외로이 울리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거쉰 "랩소디 인 블루"
음악 역사의 방향을 전환시킨 명곡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랩소디 인 블루》가 그중 하나이다. 이 곡의 초연은 1924년 2월 뉴욕에서 댄스 밴드 리더인 폴 화이트먼의 리드 아래 이루어졌으며 ‘현대 음악의 실험’이라는 평을 받았다. 거슈윈은 이 곡을 서둘러 작곡하였고 악기 편성을 편곡가 퍼디 그로페에게 맡겼으며 일부를 피아노 독주로 즉흥 연주하기도 하였다. 화이트먼이 편곡한 작품은 곳곳에 공백이 있었고 이 부분들의 끝에는 ‘끄덕일 때까지 기다리시오’라는 지시가 첨부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작품은 곧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거슈윈은 유망한 브로드웨이 송라이터로 성공 가도를 달렸고 곧 세계적 유명인이 되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대중적이고 재즈적인 음악 소재를 끌어다가 클래식 형태로 변형하고 재구성하여 전통적 구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소재들을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완성도 있는 결과를 창출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재즈는 ‘크로스 오버’ 음악이 아닌 퓨전 음악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진지한’ 음악으로서의 가능성을 입증 받았다.
《랩소디 인 블루》 음반의 역사를 돌아보면 사실 매우 어수선하다. 그로페는 첫 밴드 스코어에 이어 극장 오케스트라 버전을 내놓았지만 이것은 이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그가 만든 세 번째 버전인 오케스트라 완결판이 주로 연주된다. 발간된 악보들 중 일부에는 독주 에피소드들이 생략되어 있고 해석상의 차이도 보인다. 일관되지 못한 여러 버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칫 연주에 혼란을 가져 올 수도 있다. 오늘날의 음반들은 주로 첫 번째 버전을 따른다. 제임스 레바인의 음반은 독주 부분을 환상적으로 연주해내며, 시카고 심포니 또한 매우 생동감 있게 연주한다.
■번스타인 캔디드 서곡
1918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버드대학교 진학하여 작곡을 전공했고, 1937년 모더니즘 음악의 대가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Dimitri Mitropolous)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하버드의 미학교수 였던 데이비드 프롤(David Prall)로 부터 예술을 이해하고 음악을 표현하는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39년 그의 졸업논문은 '인종적 요소가 미국 음악에 끼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썼다.
졸업 후에는 F.라이너, S.쿠세비츠키에게 지휘법을, 톰프슨에게 관현악법을 배웠다. 1943년 뉴욕필하모니 음악감독이었던 아서 로진스키(Arthur rodzinski)의 인정을 받아 뉴욕 필하모닉의 보조지휘자가 되었다. 그해 11월 14일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급환으로 지휘를 못하게 되자, 그의 대신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를 맡았고 CBS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다. 번스타인은 이 한번의 기회로 유명세를 탔고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944년 피츠버그 교향악단을 지휘하였고 자신의 첫 교향곡 《예레미야 심포니 Jeremiah Symphony》을 연주했다. 그후 포드 자동차의 의뢰를 받아 연주회를 열었고 CBS를 통해 방송되었다. 번스타인은 다시 뉴욕 필하모닉으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지휘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57년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이듬해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였고 그가 연주하는 음악회는 최대의 흥행을 보증하게 되었다. 번스타인은 뮤지컬《웨스트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1957)의 음악을 담당하면서 가장 미국적인 뮤지컬을 창작하였다는 칭송을 받았다.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조곡
러시아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 Pyotr Ilych Tchaikovsky, 1840~1893)”는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의 고전 발레 음악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작곡한 작곡가로 유명한데 그 중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바로 크리스마스의 고정 레파토리 공연인 발레 “호두까기 인형”일 것입니다. (악보에는 P표시가 5개나 있다.) 이 곡은 커피의 맛을 표사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2차 세계대전은 러시아로 확전되었고 히틀러가 저지런 대량학살 소식이 미국에 전해졌다. 부모가 러시아 출신인 번스타인은 러시아 난민을 돕자는 자선행사에 자주 초대되어 나갔으며 카네기홀 등에서 자선 연주회를 열었다. 번스타인은 음악뿐만 아니라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진보당 창당에 관여하였고 진보적 단체의 단결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그는 FBI의 조사를 받았으며 그의 정치적 성향은 공산주의로 분류되었다. 그는 CBS 방송국 출입이 금지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의 음악과 공연은 취소되었다. 번스타인은 정치적인 성향 때문에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마침내 미국의 유력지인 라이프 지에 50명의 대표적인 좌파 블랙리스트로 번스타인이 소개되었고 뉴욕 필하모닉 지휘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1953년 7월 미국 국무부는 번스타인의 여권 갱신을 거부하였고 항상 FBI의 감시를 받으며 고립되었다가 자신의 활동과 신념을 부정하는 진술서에 서명하고 나서야 여권을 받아 유럽으로 갈 수 있었다. 그해 8월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연주활동을 하였는데 음악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으로 보수적 성향의 미국인임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 결과 컬럼비아 영화사의 승인을 얻어내 《워터프론트 Waterfront》(1954)라는 영화음악 제작을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보적인 성향이 보수로 전향한 것은 아니었으며 미국내 민권투쟁과 인종차별 등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 참여하였다. 1964년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민권운동에 가담하여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와 함께 앨라바마에서 열린 셀마 대행진에 참가하였다. 번스타인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닉슨 행정부가 일으킨 베트남 전쟁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종전을 주장하였고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시기에 자신의 사회사상을 표현한 교향곡《카디시 Kaddish》(1963)와《치체스터 시편 Chichester Psalms》(1965)을 발표하였다. 미국의 보수파인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미국내 진보세력의 몰락을 우려하였고 보수파가 추진하는 핵무기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과 다르게 변모하는 미국사회의 모습으로 번스타인은 상실감으로 실의에 빠져들었다. 20세기 미국을 표현하는 오페라를 구상하였으나 끝내 작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1985년 세계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영국, 일본, 그리스, 헝가리 등지에서 연주했으며 이후에는 주로 유럽을 무대로 연주활동을 했다. 1990년 10월 14일 사망했다.
작품으로는 《에레미야교향곡》(1942), 오든(Auden)의 시를 작곡한 피아노와 관현악곡 《불안의 시대》(1949), 발레음악 《팬시 프리》(1944), 뮤지컬 《거리에서》(1944), 《타히티의 트러블》(1952), 《웨스트 사이드스토리》(1957), 영화음악 《워터프런트》 등이 있으며, 음악에 관한 저서로는 《음악의 즐거움》(1959), 《음악 이해를 위한 젊은이의 콘서트》(1962), 《음악의 무한한 다양성》(1966) 등이 있다.
제1곡 : 작은 서곡 콘트라 베이스와 첼로와 같은 저음 현악기는 제외된 자그마한 서곡으로 바이올린의 멜로디가
동화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제2곡 : 행진곡 클라리넷, 호른, 트럼펫이 행진의 시작을 알리면 크리스마스 파티가 한창인 홀을 향해 어린이들의 행진이 시작된다. 제1, 제2 바이올린의 멜로디를 따라 마구 좋아 날뛰는 천진난만한 개구쟁이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제3곡 : 사탕요정의 춤 발레 전곡에서는 여기서부터가 2막이다. 마리와 왕자는 작은 배에 실려 과자 왕국으로 향한다. 이들은 별사탕요정의 환영을 받는다.
이 별사탕의 요정을 묘사한 첼레스타의 카랑카랑하면서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음색은 이 곡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제4곡 : 러시아의 춤, 트레파크 트레파크란 러시아 농민들이 즐겁게 추는 민속무용으로 아주 격렬한 춤이다.
이 곡에서는 제 2바이올린의 연주로 4번씩이나 되풀이되어 나온다.
제5곡 : 아라비아의 춤 트레파크와는 대조적으로 나른한 아라비아 지역의 정서를 물씬 풍기는 곡으로, 원주민의 북소리처럼 울리는 리듬을 타고 잉글리쉬 호른과 클라리넷의 전율이 아련히 흐른다.
이에 이어서 약음기를 낀 바이올린이 향수에 잠긴 멜로디를 붙여 곡이 아주 약하게 끊어질 듯이맺음을 한다.
제6곡 : 중국의 춤 왕자는 마리에게 이번에는 중국의 차를 권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때에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고 있었다.) 마치 주전자에서 펄펄 끓는 차를 따르듯이 단조롭고 묵직한 파곳과 콘트라베이스의 리듬을 타고 플루트가 호르륵 호르륵 따라간다.
제7곡 : 갈잎 피리의 춤 장난감 피리를 모방한 것으로 세 자루의 플루트가 산뜻한 3중주를 현악기의 반주로 연주한다.
중간 부분에서 이들 플루트는 잠시 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3중주를 되풀이하고 곡을 맺는다.
제8곡 : 꽃의 왈츠 발레에서도 전원이 모두 등장하는 마침곡으로 되어 있으며, 웅장한 D장조이다.
악기수도 점점 불어나는데 현악기의 리듬을 밀치고 우렁차게 퍼지는 힘찬 호른군의 음은 매우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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