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군산시립교향악단
작성일1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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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비제 <아를르의 여인>
지금은 〈아를의 여인〉이란 작품이 비제 고유의 것으로 인식되지만 원래 《아를의 여인》은 알퐁스 도데가 본인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각색한 3막 5장의 희곡이었다. 1872년 즈음의 비제는 매우 왕성한 창작력을 보이던 시기였으므로, 희곡이 발표되던 그 해에 바로 이 연극을 위한27곡의 부수음악을 만들어 공연을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Daum백과] 아를의 여인 – 클래식 백과, 이보경 외, 음악세계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아를 인근에 사는 부유한 농가의 청년 프레데리는 아를의 투우장에 왔다가 한 여인을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프레데리 집안의 사람들은 그 여자의 불순한 과거를 이유로 둘의 사이를 완강히 반대하는데다 목장지기 미티피오라는 자도 찾아와 자신이 그 여인의 연인이라며 둘의 결혼을 방해한다. 이 가운데서 어찌할 바 모르던 프레데리는 결국 근래에 자신을 사모하는 어린시절의 친구 비베트와 약혼을 하게 된다. 그러다 프레데리는 비베트와의 결혼식 전날 밤 벌어진 축하 파티에서 춤추는 아를의 여인을 보게 되고, 애끓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게 되자 곡물창고의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만다. 비극으로 끝나는 이 연극은 안타깝게도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호평을 얻지 못하고 단 21회 상연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사실 연극 상연 당시에는 비제의 음악도 그리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지금은 이 곡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는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아기자기함이 당시에는 단점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비제는 연극이 종연된 후에 바로 전체 27곡 중에서 네 곡을 간추려 종래 합창단과 소규모 관현악 편성이었던 곡을 대규모 관현악 편성으로 개작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제1모음곡 네 곡이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다. 비제가 죽고 나서 4년 후에 그의 친구이자 파리음악원의 교수였던 에르네스트 귀로는 다시 네 곡을 간추려 제2모음곡을 만들었는데, 이 역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두 개의 모음곡 가운데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곡은 역시 귀로가 개작한 제2모음곡의 3곡
‘미뉴에트’이다. 사실 이 곡은 본래 비제의 오페라 〈아름다운 페르트의 아가씨〉에서 선율을 가져와 만든 것으로, 〈아를의 여인〉에는 없는 음악이다. 사실상 제2모음곡 가운데서 비제의 원곡을 그대로 살린 것은 2곡인 ‘간주곡’뿐인데 모음곡 전체 8곡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곡이 귀로의 재창작품이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하이든 고별교향곡
《교향곡 제45번 올림바단조 Hob.I:45 ‘고별’》은 요제프 하이든의 교향곡 중 하나로 고별교향곡 이라고도 불린다. 당시의 관현악 작품이자 교향곡으로서는 드물게 올림바단조를 쓰고 있다.[1] 당시 큰 성공을 거두어 동시대 작곡가 요한 마티아스 슈페르거(Johannes Matthias Sperger)는 교향곡 《도착》을 작곡하기도 했다.
하이든을 고용하였던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1766년에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화려한 궁성을 노이지트라 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아름다운 장소에 건축을했다. 이 궁성은 에스테르하지 하궁(夏宮)으로 불렸으며 처음에는 비좁은 관계로 관현악단의 연주자나 하인들은 가족을 데려올 수 없었다. 단원들 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된 것은 악장 하이든을 포함한 겨우 4명뿐이었다. 결혼한 삶에게는 봉급을 더 주게 되어 있었으나 그 대신에 많은 단원들은 여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에스트르하지 하궁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1772년은 보통 머무는 6개월보다 2개월이나 더 머물렀다. 그 일로 단원을은 하이든에게 이 불편한 생활을 해소할 수 있도록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이든은 1가지 방법을 생각해내서, 곡의 마지막에 연주하는 단원이 1명씩 연주를 끝내고 악기를 챙겨 보면대 위의 촛불을 끄고 퇴장해서 아주 소수만 남아 조용하게 연주를 이어가는 교향곡을 작곡해서 단원들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고별교향곡’이 만들어졌으며, 조성도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외로운 올림바단조가 선택되었다. 이 곡이 실제로 후작 앞에서 연주되자 니콜라우스 후작은 즉시 그 뜻을 깨닫고 다음날 다원 전원에게 휴가를 주었다. 이 일화는 그리징거와 디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이 곡에 주어진 ‘고별’이라는 부제는 18세기 말경에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곡은 일반적인 4악장으로 되어 있는데, 4악장만 빠른 마지막 곡 다음에 단원이 하나씩 퇴장하는 안단테가 붙어 있다. 현재 자필악보가 부다페스트 국립 세체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완성된 것은 1772년이다. 당시 하이든이 악장으로 섬기고 있던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노이지트라 호반에 피서용 여름 궁전을 만들고, 여름이 되면 악단원들을 데리고 자주 갔다. 그런데 그는 1772년에는 가을이 다가왔는데도 아이젠슈타트의 본궁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무렵엔 별궁이 악단원들의 가족들까지 수용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사람은 하이든을 포함해 4명뿐이었다.[2] 악단원들은 빨리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후작은 좀처럼 단원들에게 휴가를 주지 않았다. 하이든은 여러 사람의 희망을 알아차리고 이 곡을 만들어 에스테르하지 후작에게 호소하였다. 즉 종악장에서는 모두 제각기 자기 담당의 연주를 끝내면 촛불을 끄고 조용히 퇴장하고, 최후에 바이올린 두 사람만이 남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악단원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다음날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찌고이네르바이젠
사라사테가 1878년에 작곡한 〈찌고이네르바이젠〉은 독일어로 ‘집시의 노래’라는 뜻으로, 스페인 집시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선율을 토대로 만든 사라사테의 대표작이다. 사라사테가 작곡한 대부분의 음악이 그렇듯 이 곡 역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다.[Daum백과] 찌고이네르바이젠 – 클래식 백과, 이보경 외, 음악세계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찌고이네르바이젠〉은 비르투오소 사라사테가 직접 연주하려는 목적으로 작곡했기 때문에 연주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곡이다. 이 곡의 연주자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짧은 카덴차와 리타르단도, 그리고 페르마타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정열적인 집시의 이미지를 전달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사라사테의 작품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빠른 스피카토 패시지, 더블스톱, 글리산도, 왼손과 오른손의 피치카토, 자연 하모닉스와 인공 하모닉스가 집시의 선율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찌고이네르바이젠〉은 약 8~9분 길이의 단일 악장 곡이지만, 템포에 따라 모데라토(보통 빠르기), 렌토(느리게), 운 포코 피우 렌토(좀 더 느리게), 알레그로 몰토 비바체(아주 빠르고 생기 있게)의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모데라토 부분은 애수가 느껴지는 유명한 G현의 선율로 시작한다. 바이올린이 가장 낮은 G현에서 가장 높은 E현까지 오가며 화려한 패시지를 연주하고 나면 마치 즉흥연주를 하듯 자유롭고 표현적인 렌토 부분이 시작된다. 사라사테 특유의 고음 패시지들은 집시 여인의 노래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운 포코 피우 렌토 부분에서는 약음기를 끼운 바이올린이 음울한 음색으로 한숨 쉬듯 서글픈 선율을 연주한다. 빠른 템포로 연주되는 알레그로 몰토 비바체 부분에서는 전형적인 집시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이 경쾌하게 춤을 추는 듯 빠른 스피카토와 피치카토를 연주하면서 곡이 마무리된다.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
1812년 나폴레옹은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략하여
모스크바를 점령한다. 그러나 러시아 군의 반격과 추위와 굶주림으로 나폴레옹 군은 러시아에서 퇴각한다. 〈서곡 ‘1812년’〉은 바로 이 역사적 사실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5개의 주제로 묘사되었으며, 여기에는 현재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러시아 민요, 러시아 국가 〈주여, 차르를 보호 하소서〉가 사용되었다. 사실 〈라 마르세예즈〉와 〈주여, 차르를 보호 하소서〉선율의 사용에는 연대기적 오류가 있다. 이 두 작품은 1812년 당시 프랑스와 러시아 국가가 아니었다. 〈라 마르세예즈〉는 이미 1795년 국가로 선택되었지만1805년 나폴레옹이 이를 금지하였으며, 공식적인 프랑스 국가로 다시 채택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주여, 차르를 보호 하소서〉는 차이콥스키 시대의 러시아 국가였다. 역사적 사실이 어떠하든지 간에, 작품에서 이 두 선율의 적절한 사용은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의 순간과 퇴각이 시간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제1부분은 비올라와 첼로로 연주되는 러시아 정교 성가 〈주여, 당신의 백성을 구하소서〉이다. 간혹 이 성가에 가사를 붙여 합창으로 노래하기도 한다. 제2부분은 보다 빠르고 활기 있는 주제로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으로 연주된다. 이 주제는 전투에 임하는 러시아 군대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선율은 나폴레옹 군이 러시아 진영에 나타난 것을 표현하였다.
4번째와 5번째에 나오는 주제는 모두 러시아 민요와 민요풍의 선율로 러시아를 묘사하였다. 노브고로드(Novgoroad) 지방의 민요를 사용한 4번째 주제가 조용하게 제시되며 다소 밝은 민요풍의 5번째 선율이 이어 나온다. 이 두 개의 선율은 전쟁전의 러시아 국민들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지막 제3부분은 프랑스 군대와 러시아 군대와의 격렬한 전투를 묘사한 장면으로 두 나라를 대표하는 두 개의 선율이 교차하며 연주된다. 초반에 우세하게 들리던 〈라 마르세예즈〉가 점차적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프랑스군의 퇴각을 묘사한다. 여기에 정규 관현악곡에 쓰이지 않는 대포소리와 조종소리가 제정 러시아의 국가 〈주여, 차르를 보호 하소서〉와 함께 더블포르티시모로 제시되어 러시아 군의 승리를 보여주며 곡을 끝맺는다. 마지막의 대포 장면은 대포를 사용(DG, 1989 녹음판)할 때도 있지만 연주에 따라 녹음된 대포소리, 총소리, 큰 나무 망치, 베이스 드럼이나 탐탐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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