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군산시립교향악단
작성일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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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W Korngold Violin Comcerto Op.35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 (Violin Concerto, Op.35)”은 1945년에 완성되었다. 애숭이 시절 자신의 멘토가 디어 주었던 구스타프 말러의 부인이였던 알마 말러에게 헌정되었다. 초연은 1945년 2월 15일 프랑스계 미국인 지휘자 브로니슬라브 후베르만이 지휘하는 센트루이스 오케스트라와 야사 하이페츠의 피아노 협연으로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있었다. 초연 이후 협주곡은 많은 바이올린 대가들의 표준 레퍼터리가 되었으며 그가 남긴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할리우드 하면 떠오르는 통속적 개념의 영화 음악과 가까이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음악은 미국 활동을 기준으로 하여 정통적인 못한 작품으로 차별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 작품 역시 오늘날 유럽 충신의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잘 연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는 13세에 벌써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여 유럽 연주 여행을 다닐 정도로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천재성을 보였다. 34세에 오늘날의 비엔나 예술대학의 전신인 Vienna State Academy의 교수로 활약했던 그는 1934년 헐리우드의 영화감독 막스 라인 하르트의 초청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워너 브라더스 영화사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게 되었다. 후기 낭만주의 음악 형태를 띠고 있는 그의 작품 경향은, 영화 제작사들의 스튜디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19335년 영화, 한여름 밤의 꿈을 시작으로 많은 주요 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하게 된다. 또한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에게 점령 당하며, 유태인 출신의 오스트리아 인이었던 코른골드는 할리우드가 목숨을 살린 셈이 되었는데, 그는 히틀러가 살아지기 전까지는 가족과 자신을 위하여 영화 음악 이외의 작품은 절대로 쓰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영화 음악계에서 발을 뺀 그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출발점으로 하여 정통적 작품에만 힘쓰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폴란드계 유태인 바이올리니스트 부로니슬라브 후베르만의 설득으로 이 협주곡을 쓰게 되었다고 하며, 하이페츠의 초연에 앞서 이 작품과 관련하여 코른골드는 아래와 같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마지막 악장에서 높은 기교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 작품이 지닌 선율적, 서정적 에피소드는 파가니니보다는 카루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카루소와 파가니니의 뛰어남을 함께 보유한 하이페츠에 의하여 이 작품이 초연되니 말할 나위 없이 기쁘다.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도입부를 시작하는 Moderato nobile 악장, 코른골드는 1937년 윌리엄 디터리가 감독함 영화 다른여명에서 사용하였던 OST를 악장의 주제로 인용하였다. Romance Andante 악장, 1936년 메르빈 르로이 감독한 영화 “Anthony Adverse의 OST를 악장의 주제로 인용하였다. Allegro assai vivace악장, 1937년 윌리암 케글 리가 감독한 영화 The Prince and the Pauper 왕자와 거지의 OST를 악장의 주제로 인용하였다.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1번 op.25 –고전교향곡
재정 말기, 피아니스트겸 작곡가로 활도 d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디아길레프의 권유로발레 알라와 롤리에서 개편된 스키타이 모음곡이나 피아노 소품 등으로 이미 유능한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 무렵 제 1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으나 그는 미망인의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징집에서 면제되고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난 1917년 여름에는 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시골에서 홀로 생활하였다 그는 일부러 피아노를 뺀 윤관이 뚜렸한 작곡을 시도해서 이 고전교향곡을 작곡하게 되었다.
재학 중 일직이 체레프니 클래식에서 연구한 하이든의 기법을 바탕으로 하이든이 현대에 생존하고 있다면 작곡했을 법한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 이 곡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전적인 의작임에 분명하지만 단지 모방이나 습작, 또는 페러디가 아니라 그 화성법이나 갑작스러운 조바꿈 등에서 프로코피예프다운 생기가 드러나고, 현대인의 살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또 단순한 스타일은 독특한 화성법과 더블어 당시의 미술계에서 일고 있었던 입체파의 주장등을 함께 반영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에게 전작 스키타이 모음곡과 같은 과격함을 기대했던 대중들은 이 곡의 명확한 고전스타일에 약간 실망한 듯 하였다. 모차르트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이것과 같은 곡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할 만큼 높은 작품으로서, 음악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그의 창작에 하나의 계기를 가져온 제1작이다. 만든 것은 1916-17년이였고, 1918년 4월 21일 페테로그라드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뉴욕의 러시아 교향악단도 미국에 있어서의 초연을 가졌다.
곡은 짧지만 4악장으로 나뉘며, 제 1악장과 제 4악장은 소나타 형식을 지키고, 관현악단의 구성은 모차르트 시대와 같이 플루트, 클라리넷, 바순, 호른, 트럼펫 그리고 팀파니와 현악부로 이루어진 2관편성이다.
차이코프스키 슬라브 행진곡
작품번호 31, 원래의 제목은 세르비아 러시아행진곡이다. 러시아 음악협회로부터 세르비아 투르크전쟁의 부상병을 위한 자선 연주회용으로 의뢰를 받아 1876년에 작곡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의뢰받은 후 5일만에 곡을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초연되어 청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전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난을 상징하는 무거운 멜로디로 시작되는 이 곡은 세르비아의 민요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 민속가락이 러시아 국가와 다른 선율들에 배합되어 있다. 차이코프스키가 이와 같은 선율을 곡 중에 도입시킴으로써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우호를 기리고 국민의 사기를 높이려고 시도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러시아와 우호관계에 있던 세르비아와 터키의 전쟁은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원조하고 있는 사이에 결국 확대되어 러시아, 터키 전쟁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1876년 11월에 세르비아의 부상병을 위문하기 위해 음악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를 위해 쓰여진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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