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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내항과 구세관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
작성자 ***
작성일10.06.23
조회수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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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내항과 구 세관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
문화 관광해설사로 이곳에 배치를 받아 근무하기 이전에는 옛 군산 세관에 대한 지식이 충분치 않아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가면서 군산항을 중심으로 일본인 거주당시 강점기에 겪어야 했던 우리지역의 쌀의 수탈사와 그 시대 사회상과 숨은 이야기들을 연구하고 정리해가면서 미흡한 부분이 많이 있지만 군산 내항과 구 세관에 얽힌 여러 가지 대한 이야기를 써본다,
1, 우리나라 근대 건축물 건축사 측면
옛 군산세관은 1905년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시작된 군산항 제1차 축항공사 기간 (1905년~1910년)중인 순종 (2년 6월)인 1908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세관 앞에 까지는 갯벌과 바닷물이 가까이 있었고, 한적한 해변이었다, 서양 양식건평은 228,10m (약 69평)이고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 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 자재를 수입하여 건축했다고 한다.
군산은 1903년 6월3일 탁지부가 있었고 1904년 발발한 러일 전쟁과 일본정치의 통감부 총독부 도 당국이 만들어진 시절이라 군산세관은 탁지부 건축소에서 건축했다는 설로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있으나 세관에서 발표한 자료를 근거로 정리하면, 외벽은 화강암 기초위에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쌓인 구조로 내부는 회벽을 이용하여 유럽양식으로 장식되고
이 건물 화강암 공사는 군산항 부두석축 공사에 동원된 중국인 석공들이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기와 모양의 동판으로 물고기 비늘처럼 올려지고, 고풍스러운 지붕 위에는 3개의 뾰쪽한 철탑이 하늘을 찌르는 듯 솟아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현재 국내에 서울역 건물과 한국은행 본점 건물을 합하여
우리나라 근대 역사를 간직한 건축 물 중 남아 있는 3개의 건물 중 하나로 건축사 연구 자료로 이 건물이 각광을 받아오는 소중한 자료가 된 다, 이 세관의 본래 사용 용도는 개항장은 군산항에 입출항 하는 외국선박에 관세를 부과하여 대한제국 수입을 증가 시키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 이관세가 지세 다음 대한제국 수입에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관세수입이 거의 외국 차관에 대한 이 자금 상환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나라살림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군산항도 1908년 세관과 부두를 일본인들이 점유하여 무역업자나 큰 자본가들은 관세부담을 저희들끼리 눈감아주는 일이 많았고 만면에 우리 영세한 민족자본가에게는 관세가 상품운송의 큰 부담이 되었다 한다,
이 세관을 1993년 군산세관 신청사 완공 후 구 세관이 낡아 철거하려고 토목공사 설계까지 마친 상태의 건물을 역사적 가치를 알아낸 당시 방 길남 세관장의 노력으로 1994년 지방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어 보존하였고, 현재는 건물내부에 일제 강점기 사진을 전시해 당시의 역사자료 전시관으로 활용해,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달래는 일제 강점 시 수탈사를 기억케 하는 자료가 공개 되고 있어
이곳을 찾아오는 역사학자들과 근대건축학 연구가들은 물론 젊은 학생들에게 민족 수탈 사 를 설명해주고 그 역할을 해내는 소중 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이 언제부터 인가 청사 안에 비가 오면 누수가 생겨 보는 이 들이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다, 옛 세관 설비 평면도와 당시 자료들은 군산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이 거의 보관하고 있고
우리지역에는 별로 확보된 자료가 없으나, 군산출신 젊은 사진작가 한분이 수년간 정성스럽게 모아온 일제강점기 우리지역에서 일어난 생생한 자료들이 아직도 햇빛을 보지 못해 필자는 늘 안타깝게 생각 한다, 최근에 일본 구주대학에 근무하는 한 교수가 보내준 군산세관 설비 평면도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지역에 입수되어 그 자료를 보게 되고,
이 도면에는 당시 항만주변의 부지와 축항공사 내용이 그려져 있어 당시를 이 도면은 1905년에 제작된 구 세관 인근이 자세히 담겨진 소중한 자료이고, 지금의 영화 동 일대를 말한 도면이다, 이 공사는 개항이후 일본 화물선이 군산항으로 쌀을 실으려고 밀려들자 군산항 확장 필요성을 절감한 항만운영 주체였던 각국거류지회에서 조선 정부에 건의 하여 시작됐고,
1905년경에는 대한제국이 경제파단 상태였기에 외채 상황시기에 맞물린 조선정부가 도리 없이 일본과 조선의 중개무역에 목숨을 걸고 있던 군산거주 일본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 사업이 시행되도록 방치한다, 이때 일본상인들은 라포트 라는 프랑스 세관 책임자를 매수하여 당시 8만6천원을 대한제국 자금을 투자케 해,
세관용지 일부와 강변 매립공사, 부잔교 1기설치를 철치 하고 육상과 접안이 편리한 석축 접안시설공사로 진행하고 대한제국 자금은 투자되었으나, 공사감독은 일본인들이 하게 되어 자기들이 사용할 항구시설을 대한제국 자금과 한국인들의 저임금노동으로 만들어 준공 하는 공사가 되었다,
1,일본인들이 군산에 거주하기 시작하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 국제적 힘의 우위를 확보하고 대한제국을 영구히 점령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시기에 만들어졌다. 개항 이전에 군산항의 모습은 개항하기 이전 470여 년 전 에는 군산포영(群山浦營) 세종 5년-서기 1423경 ) 370여 년 전 에는 군산 창 (群山倉, 중종 7년- 1524년경)이 있었던 곳으로
이 조 때 농민들이 지방 토산물을 빈부의 차에 따라 나라에 바치는 貢 物 (공물)과 조세는 국가 재정상 절대적 재원 이었다 포구는 작은 어촌으로 30여 호가 돛단배를 이용하거나 돌 살매 또는 나무 말 둑 사이로 칡넝쿨로 만든 그물로 고기를 잡던 원시적 어업을 하던 어촌으로 30여 호가 평화롭게 살던 포구였다고 본 다.
일본인이 군산에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1894년에서 군산이 개항하여 각국조계 지역이 된 1899년까지 5년여 였 다, 이 들은 수덕산 아래에 모여 생활을 하고 군산에 처음 들어온 일본인은 군산, 옥구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미곡상인 사도도미지로(左勝豊次郞)가 구 영 리(舊營里에 작은 판자 집을 짓고 생활 하였고 개항이전에 은밀하게 들어온 일본인들은 숫자가 늘어 1899년에는 70여 호 125명에 이른다,
개항 당시 옥구 군 북면에는 2,834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기록에는 150가구 511명이라 했고, 일본인은 가구 수 20가구 77명이라 하나 조계 지역안만 계산된 내력으로 보인다 이들은 천연 무역항구인 군산을 주목했고 1892년 조선정부의 증기 수송선 경제호가 곡미 수송차 군산항에 입항하였고 1894년 군산에 처음 도착한 미국 남장로교 소속선교사들이 제물포에서 군산까지 여객선을 이용한 것을 볼 때 이때 군산에는 정기 여객선까지 다닌 것으로 보였다.
1, 그 시대 사회상과 숨은 이야기
군산의 각국 조계지역이 만들어 지는데 그 조계지란 거류지를 개항장과 주거지로 분리하고 치 외 법권 지역으로 만들어, 전관 조계지와 각국 조계지로 구분하여 살았는데 군산에는 한성에서 박 재순 과 체결된 일본, 프랑스, 영국, 러시아, 독일, 각국 사신 간에, 조계장전이 체결된 지역으로. 그 면적은 17만 3 천 평 이고, 이때 조계지안 조선인들은 조계지 밖으로 이주당하고 분묘까지 이장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1904년 일본육군 3000명이 군산에 상륙하여 긴장을 고조 시켰다, 평지는 일본인에게, 산비탈은 조선인이 토막이라는 움막형태 흙집을 짖고, 남자는 부둣가에서 막 노동을 하고, 여자는 일본인집 식모살이 와 미 선공을 하며 주로 생활하였던 당시의 가난한 삶의 모습을 추측해본다,,1920년대 군산 시 총 인구가 14,138명인데 그중에 한국인은 8,243명이고, 일본인은 5659명으로 60%: 40% 근소한 차이 였 다.
군산의 이사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이후 노랑색 2층 양옥으로 만들어지고 군산일본 영사관이 있던 그 자리에 1908년 시멘트 마감으로 연한 아이보리 색 페인트칠을 한 건물이 조선시대 해군기지 군산 진영 터 였 던 곳에 그들이 자리를 잡아 경찰, 행정, 감옥사무를 병행하여 3권을 장악 막강한 권력을 지닌다.
1910년대 수덕산 넘어 북쪽바닷가 등대와 부청사 사이에서 오포라 하는 대포를 정오에 한방을 쏘아 시간을 알려주었다, 시계가 없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수단이 되었다지만, 영국이 자국의 식민도시에 숨겨진 진실은 대포를 쏘아 올려 피지배 민족에게 지배자의 힘을 인식케 했다, 군산 부 청사는 1928년 11월에 준공하여 1995년까지 사용하였다
나가사끼 장기 18은행은 1870년 일본 나가사끼 지방 에 있던, 대규모 상인을 중심으로 출발한 은행이다, 1878년 나가사끼 무역항 기능을 잃자, 조선에 진출 인천에는 1890년에 문을 열었고, 군산에는 1907년 설립 조선에서 일곱 번째 지점이다,
해관으로 출발한 세관의 변천사
이렇게 나름대로 세관의 출발점 역사자료를 찾아서 정리하다 보니 필자에게는 세밀한 자료가 마 탕 히 없어, 우리나라 세관에 관련된 숨은 야화를 찾아보려고 세관 120년 야사를 뒤져보았다, 책을 읽다보니 우리나라 세관의 초창기 발전사와 여러 가지 이야기가 흥미가 있어 여기에 정리해본다 세관 업무는 그냥보기 쉽게 물품을 통관하는 곳으로 세율을 미리 정해놓고
물량에 따라서 세금은 내는 곳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알고 보니 때로는 목숨을 걸고 밀수범들과 목숨을 걸고 대결을 하거나 날씨와 해상조건이 사나울적에도 밀수선을 소탕하기 위해서 일본대마도까지 가서 밀수근절을 위해서 고생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독꼬오타이를 잡는 일명 를 포박 하려고 쓰시 마 해역을 목표로 잠복하다가,
우리세관원이 탄 선박이 기관 고장으로 망망대해에서 몇 일간 사투를 벌이다 오우꾸지해안선에서 일본해안 보안청 배에 이끌리어 영해 침범의 올가미로 이즈하라 구치소 수감 45일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강제로 추방된 일도 있다는 자료를 보았다, 우리나라에는 최초로 1883년 3월 봉천여 조선변민 교역장정 24개조와 한일 통상장정 및 해관 세칙이
1883년 7월25일 저녁 6시에 체결되어 당시 청국 상인들이 엉성한 항만관리 약점을 이용하여 밀수를 자행, 단속하는 인천 해관 습격은 물론 통상외교, 통화산업으로 다방면에 심각한 피해를 주던 이들을 단속하기위한 해관이 1883년 5월에 창설된다. 여기에 한국관세 수입담보 및 탁지부고문 총세무사 해관에 일본인 1인과 고문관 파견을 하기로 하고
고종 황제는 1882년 11월 뭴렌 도르프(mollendoff) 독일 영사관 부영사 출신을 임명한다. 1885년 6월 청국이 한,청 전선 조약체결하고 청국에서는 화전국의 시공을 맡고 최초로 전화선 설치공사를 하도록 한 다, 1887년 서울에 점포는 45곳이 있었는데 고문관은 1894년 7월 청일전쟁과 임오군란이 끝난 후
초대 총무 세무사로 고종 임금 접견 시 뭴렌도르프는 청나라인 리 홍장 소개로 고종 임금을 접견하는데, 그가 고종 임금 접견 시 조선왕을 뵐 때는 조선식으로 큰절을 세 번 하고 안경 벗는 일을 잊지 말아야한다는, 리 홍장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간 고종황제는 안경을 끼고 왕을 접견하는 외국 사신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관행을 통과한다.
그 후에 그는 조선인 하인을 고용하고 내외고관초대나 가든파티까지 참석하고 초헌(종2품) 이상의 고관이 타는 사람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녔다. 어느 시대나 반대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고 여기 왕실에도 있지만 내일을 크게 침해할 만큼 크지 못했다, 1894년 청 일 전쟁 시 인천에는 일본인 5000명이 살고 있었는데,
한성이었던 서울인구는 30만 명이었다. 일본인들로 구성된 왜상들이 노출 병으로 방탕 성 때문에 조선 사람들이 왜상을 기피해서 장사가 잘 안 되었기에 격자문 유리를 달아 밖을 내다보고 점포 앞에는 조선 사람을 내세워 장사했다, 1896년 8월 김 구 선생이 민비왕후 시해 일본인 범인을 잡아 죽인 죄로 인천감옥에서 사형수로 있었다,
사형을 집행하기 직전 감형 사실을 전화로 고종 황제가 감 일등급을 시킬 때 이 전화를 활용하고, 1898년 3월 영국함대 8척을 인천항에 입항 영국 해병대가 입경했다, 우리나라 최초 전화선로 개통작업은 청나라 사람들이 인천에서 부터 시작했고, 당시 전화가설에 참여했던 화전국원이 전화선 가설에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다른 물품들을 들여와 밀수에 주도하기도 했으나,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함으로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1906년 1월 통감부정치로 한국해관의 청나라의 운영권이 일본 정부에 귀속되어, 1906년 일본 통감정치가 시작되었다,
1, 최초 우리나라 관세법 제정과 변천과정
경의선 철도업무시작은 물동량과 교역이 한선을 중심으로 인천항을 이용했고 인천, 부산, 원산, 진남포가 조선 육접국경 관세령으로 1913년 월드물류32로 물류를 취급했다, 당시 1904년 만주철도 운영과 만주국 탄생이 되고
당시에 한국인들은 자본도 미약하거니와 상술에도 일본인의 적수가 될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이 처음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농지를 구입할 적에는 논문서를 가져오면 공짜로 몇 년 농사를 지어먹게 하게나 헐값을 주고 농지를 거저사고 몇 년이 지나기 전에 소작료를 계속 올리는 방법으로 결국은 식량조차 전부 가져가 옥구농민 항쟁사건까지 발생케 하고
군산항을 통해 년 간 1920년경에는 30여만 가마의 쌀을 3000톤 배로 군산선에 열차 150량을 연결해 가져가고, 1930년대까지 호남선 철도는 일본으로 실려 가는 쌀부대가 초만원이었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패망하고, 1945년 9월 8일까지 일본인 직원은 잔무정리를 기화로 야간에 기밀문서를 소각하기도 했다.
군산에서 일제징용으로 증발된 사람들이 대기하고 군산역에서 일본으로 징용을 출발하려고 하는데 전쟁이 끝나서 일본에 안가도 된다 해서, 불안한 몇날을 보낸 사실이 구전으로 알려졌다. 나라가 해방이 되고 조국재건의 의욕이 불안한 정국을 주도할 때, 1946년 여름은 중국과 남방에서 전쟁터에서 귀환하는 선편에 콜레라가 전염 인천 부산은 물론 전국에 크게 번지고, 1만 여명 환자발생과, 수 천 명 사망한시기가 있었다,
1947년 8월25일 미군정 법령 제149호로 대외무역규칙이 만들어지고, 서울 인천, 군산, 목포, 제주, 부산, 묵호 등 7개 세관이 만들어지고. 세관 업무를 시작했으나 마땅한 세관원의 제복이 없어, 세관제복은 미군고문관 주선으로 미군 복. 내의를 지급받아 관복으로 개조해 입 었 다, 러 취 미군정 장관은 한국 사람들은 쌀만 먹어서 쌀 기근이 생긴 다, 고기도 먹어라 하는 장군 성명에서 웃음거리가 된 일도 있었고.
미국식 일방적인 행정을 증명하는 유명한 이야기다, 군산세관 3대 엄 승환 세관장은 (1947년 ~ 1949년)까지 근무를 했고, 그는본부 4과장 (감정과장) 임명을 받아 세율 표 작성, 세율안 배정의 1949년 2월 9일부터 법률 제19호 세관관서 설치법 시행령으로, 인천, 부산, 서울, 군산, 목포, 여수, 마산, 제주, 묵호 9개 세관으로 만들었다,
세율 안을 만들어 국회에 보내 토론 하던 중 시계의 세율이 높게 배정되자, 대한민국 초기에 시계를 찬 사람은 그 시계가 사치품으로 보여 지금의 자동차 고급차를 처음으로 산 사람의 구분 되는 격 이였기에, 장택상 의원이 일어서면서 양복조끼에서 금제 회중시계를 꺼내들고 나는 평생시계를 안차고는 못산다 하면서, 사치품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야, 문화인의 필수품이야 이것을 사치품이라고 보는 것은, 재무 당국자가 무식한 소치야 적어도 50% 인하해야 해요 하면서
이의신청을 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군산 세관에는 1947년 12월 중순 상해방면에서 중국무역선 5척으로 면포, 비단, 설탕, 염료, 사카린 등을 실어 군산항에 입항, 당시 군산시장 박 모, 비릇 해 무역협회 간부인 조모, 권모, 정모, 등이 무역선단을 위해 환영연 베풀어 주는 등 야단 법 석 를 떨었다,
지방 유지들은 시장과 일부 권력 기관을 동원 “ 군산항의 발전을 위해 세관에 대해 관세를 잘 봐 달라고 압력을 행사해 세관에서 본부의 승인이 있어야 통관을 해주겠다고 했더니 위조통관서류를 제시해 검찰에 고발까지 하고. 결국 군정 법령에서 종가 10%로 되어 있다는 서신과 적당히 통관 시켜줄 것을 부탁해왔다. 그런데도 세관은 끝까지 추적해 반절만 우리 농, 수산물과 바꾸는 무역을 하기로 하고 통관을 시키고
인천까지 뒤 쫒아가 배를 몰아내기도 한 사실이 있다한다, 우리 문화 역사를 보존키 위해 군산세관 61대 방 길남 전 세관장은 항만청에서 부잔교를 철거하는데 부잔교 철거가 너무 가슴이 아팟고, 그는 구 군산 세관만이라도 헐지 못 하도록 실무자들을 설득하고 토목공사 계약까지 끝난 상태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원형 보존토록 했다 한 다,
구세관의 옛 건물이 관광명소가 된 지금 부잔교 목제로 위로 솟 앗 던 자료 사진을 2010년 6월초까지 구하고 있다, 더 아쉬운 건 옥탑전망대 철거가 새 건물 터파기 행사계약 철거 중 중단했으나 결국은 신청사 마련 때문에 헐어졌다 한다.
해방 후 미곡이 부족한 일본에서는 미곡을 밀수입 하면서 년 간 8만석 쌀을 밀수해갔고, 해태, 수산물, 마른새우를 가져갔고, 일본에서 가져온 남한의 밀수품은 화장품, 학용품, 양품, 옷감, 기계부품을, 북한에서는 전기 공급 댓가로 남측에서는 광목, 약품, 전선, 기계부품을 보냈고 북한에서는 카바이트, 비누, 청어, 명태를 남한으로 교역했다.
내가 참여해본 문화관광 해설은 방문하는 관광객 수준에 따라 물 흐르듯이 스토리텔링을 해서 사실을 말하고 다시 한 번 방문케 하는 묘미가 있어야지 한 번에 다 해결하고 이해 시키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프랑스를 방문 했을 적에 나이가 드신 여성 해설사가 몽마르트 언덕에서 땀을 흘려가면서 열심히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해주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해가면서 부족한 자료는 보완하고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의견을 모아가면서 아름답고 훌륭한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자료가 전라북도 문화관광 해설사회를 중심으로 가득히 담길 그날을 기대해본다....
◎ 2010, 6, 21
문화 관광해설사로 이곳에 배치를 받아 근무하기 이전에는 옛 군산 세관에 대한 지식이 충분치 않아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가면서 군산항을 중심으로 일본인 거주당시 강점기에 겪어야 했던 우리지역의 쌀의 수탈사와 그 시대 사회상과 숨은 이야기들을 연구하고 정리해가면서 미흡한 부분이 많이 있지만 군산 내항과 구 세관에 얽힌 여러 가지 대한 이야기를 써본다,
1, 우리나라 근대 건축물 건축사 측면
옛 군산세관은 1905년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시작된 군산항 제1차 축항공사 기간 (1905년~1910년)중인 순종 (2년 6월)인 1908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세관 앞에 까지는 갯벌과 바닷물이 가까이 있었고, 한적한 해변이었다, 서양 양식건평은 228,10m (약 69평)이고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 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 자재를 수입하여 건축했다고 한다.
군산은 1903년 6월3일 탁지부가 있었고 1904년 발발한 러일 전쟁과 일본정치의 통감부 총독부 도 당국이 만들어진 시절이라 군산세관은 탁지부 건축소에서 건축했다는 설로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있으나 세관에서 발표한 자료를 근거로 정리하면, 외벽은 화강암 기초위에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쌓인 구조로 내부는 회벽을 이용하여 유럽양식으로 장식되고
이 건물 화강암 공사는 군산항 부두석축 공사에 동원된 중국인 석공들이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기와 모양의 동판으로 물고기 비늘처럼 올려지고, 고풍스러운 지붕 위에는 3개의 뾰쪽한 철탑이 하늘을 찌르는 듯 솟아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현재 국내에 서울역 건물과 한국은행 본점 건물을 합하여
우리나라 근대 역사를 간직한 건축 물 중 남아 있는 3개의 건물 중 하나로 건축사 연구 자료로 이 건물이 각광을 받아오는 소중한 자료가 된 다, 이 세관의 본래 사용 용도는 개항장은 군산항에 입출항 하는 외국선박에 관세를 부과하여 대한제국 수입을 증가 시키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 이관세가 지세 다음 대한제국 수입에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관세수입이 거의 외국 차관에 대한 이 자금 상환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나라살림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군산항도 1908년 세관과 부두를 일본인들이 점유하여 무역업자나 큰 자본가들은 관세부담을 저희들끼리 눈감아주는 일이 많았고 만면에 우리 영세한 민족자본가에게는 관세가 상품운송의 큰 부담이 되었다 한다,
이 세관을 1993년 군산세관 신청사 완공 후 구 세관이 낡아 철거하려고 토목공사 설계까지 마친 상태의 건물을 역사적 가치를 알아낸 당시 방 길남 세관장의 노력으로 1994년 지방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어 보존하였고, 현재는 건물내부에 일제 강점기 사진을 전시해 당시의 역사자료 전시관으로 활용해,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달래는 일제 강점 시 수탈사를 기억케 하는 자료가 공개 되고 있어
이곳을 찾아오는 역사학자들과 근대건축학 연구가들은 물론 젊은 학생들에게 민족 수탈 사 를 설명해주고 그 역할을 해내는 소중 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이 언제부터 인가 청사 안에 비가 오면 누수가 생겨 보는 이 들이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다, 옛 세관 설비 평면도와 당시 자료들은 군산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이 거의 보관하고 있고
우리지역에는 별로 확보된 자료가 없으나, 군산출신 젊은 사진작가 한분이 수년간 정성스럽게 모아온 일제강점기 우리지역에서 일어난 생생한 자료들이 아직도 햇빛을 보지 못해 필자는 늘 안타깝게 생각 한다, 최근에 일본 구주대학에 근무하는 한 교수가 보내준 군산세관 설비 평면도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지역에 입수되어 그 자료를 보게 되고,
이 도면에는 당시 항만주변의 부지와 축항공사 내용이 그려져 있어 당시를 이 도면은 1905년에 제작된 구 세관 인근이 자세히 담겨진 소중한 자료이고, 지금의 영화 동 일대를 말한 도면이다, 이 공사는 개항이후 일본 화물선이 군산항으로 쌀을 실으려고 밀려들자 군산항 확장 필요성을 절감한 항만운영 주체였던 각국거류지회에서 조선 정부에 건의 하여 시작됐고,
1905년경에는 대한제국이 경제파단 상태였기에 외채 상황시기에 맞물린 조선정부가 도리 없이 일본과 조선의 중개무역에 목숨을 걸고 있던 군산거주 일본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 사업이 시행되도록 방치한다, 이때 일본상인들은 라포트 라는 프랑스 세관 책임자를 매수하여 당시 8만6천원을 대한제국 자금을 투자케 해,
세관용지 일부와 강변 매립공사, 부잔교 1기설치를 철치 하고 육상과 접안이 편리한 석축 접안시설공사로 진행하고 대한제국 자금은 투자되었으나, 공사감독은 일본인들이 하게 되어 자기들이 사용할 항구시설을 대한제국 자금과 한국인들의 저임금노동으로 만들어 준공 하는 공사가 되었다,
1,일본인들이 군산에 거주하기 시작하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 국제적 힘의 우위를 확보하고 대한제국을 영구히 점령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시기에 만들어졌다. 개항 이전에 군산항의 모습은 개항하기 이전 470여 년 전 에는 군산포영(群山浦營) 세종 5년-서기 1423경 ) 370여 년 전 에는 군산 창 (群山倉, 중종 7년- 1524년경)이 있었던 곳으로
이 조 때 농민들이 지방 토산물을 빈부의 차에 따라 나라에 바치는 貢 物 (공물)과 조세는 국가 재정상 절대적 재원 이었다 포구는 작은 어촌으로 30여 호가 돛단배를 이용하거나 돌 살매 또는 나무 말 둑 사이로 칡넝쿨로 만든 그물로 고기를 잡던 원시적 어업을 하던 어촌으로 30여 호가 평화롭게 살던 포구였다고 본 다.
일본인이 군산에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1894년에서 군산이 개항하여 각국조계 지역이 된 1899년까지 5년여 였 다, 이 들은 수덕산 아래에 모여 생활을 하고 군산에 처음 들어온 일본인은 군산, 옥구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미곡상인 사도도미지로(左勝豊次郞)가 구 영 리(舊營里에 작은 판자 집을 짓고 생활 하였고 개항이전에 은밀하게 들어온 일본인들은 숫자가 늘어 1899년에는 70여 호 125명에 이른다,
개항 당시 옥구 군 북면에는 2,834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기록에는 150가구 511명이라 했고, 일본인은 가구 수 20가구 77명이라 하나 조계 지역안만 계산된 내력으로 보인다 이들은 천연 무역항구인 군산을 주목했고 1892년 조선정부의 증기 수송선 경제호가 곡미 수송차 군산항에 입항하였고 1894년 군산에 처음 도착한 미국 남장로교 소속선교사들이 제물포에서 군산까지 여객선을 이용한 것을 볼 때 이때 군산에는 정기 여객선까지 다닌 것으로 보였다.
1, 그 시대 사회상과 숨은 이야기
군산의 각국 조계지역이 만들어 지는데 그 조계지란 거류지를 개항장과 주거지로 분리하고 치 외 법권 지역으로 만들어, 전관 조계지와 각국 조계지로 구분하여 살았는데 군산에는 한성에서 박 재순 과 체결된 일본, 프랑스, 영국, 러시아, 독일, 각국 사신 간에, 조계장전이 체결된 지역으로. 그 면적은 17만 3 천 평 이고, 이때 조계지안 조선인들은 조계지 밖으로 이주당하고 분묘까지 이장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1904년 일본육군 3000명이 군산에 상륙하여 긴장을 고조 시켰다, 평지는 일본인에게, 산비탈은 조선인이 토막이라는 움막형태 흙집을 짖고, 남자는 부둣가에서 막 노동을 하고, 여자는 일본인집 식모살이 와 미 선공을 하며 주로 생활하였던 당시의 가난한 삶의 모습을 추측해본다,,1920년대 군산 시 총 인구가 14,138명인데 그중에 한국인은 8,243명이고, 일본인은 5659명으로 60%: 40% 근소한 차이 였 다.
군산의 이사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이후 노랑색 2층 양옥으로 만들어지고 군산일본 영사관이 있던 그 자리에 1908년 시멘트 마감으로 연한 아이보리 색 페인트칠을 한 건물이 조선시대 해군기지 군산 진영 터 였 던 곳에 그들이 자리를 잡아 경찰, 행정, 감옥사무를 병행하여 3권을 장악 막강한 권력을 지닌다.
1910년대 수덕산 넘어 북쪽바닷가 등대와 부청사 사이에서 오포라 하는 대포를 정오에 한방을 쏘아 시간을 알려주었다, 시계가 없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수단이 되었다지만, 영국이 자국의 식민도시에 숨겨진 진실은 대포를 쏘아 올려 피지배 민족에게 지배자의 힘을 인식케 했다, 군산 부 청사는 1928년 11월에 준공하여 1995년까지 사용하였다
나가사끼 장기 18은행은 1870년 일본 나가사끼 지방 에 있던, 대규모 상인을 중심으로 출발한 은행이다, 1878년 나가사끼 무역항 기능을 잃자, 조선에 진출 인천에는 1890년에 문을 열었고, 군산에는 1907년 설립 조선에서 일곱 번째 지점이다,
해관으로 출발한 세관의 변천사
이렇게 나름대로 세관의 출발점 역사자료를 찾아서 정리하다 보니 필자에게는 세밀한 자료가 마 탕 히 없어, 우리나라 세관에 관련된 숨은 야화를 찾아보려고 세관 120년 야사를 뒤져보았다, 책을 읽다보니 우리나라 세관의 초창기 발전사와 여러 가지 이야기가 흥미가 있어 여기에 정리해본다 세관 업무는 그냥보기 쉽게 물품을 통관하는 곳으로 세율을 미리 정해놓고
물량에 따라서 세금은 내는 곳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알고 보니 때로는 목숨을 걸고 밀수범들과 목숨을 걸고 대결을 하거나 날씨와 해상조건이 사나울적에도 밀수선을 소탕하기 위해서 일본대마도까지 가서 밀수근절을 위해서 고생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독꼬오타이를 잡는 일명 를 포박 하려고 쓰시 마 해역을 목표로 잠복하다가,
우리세관원이 탄 선박이 기관 고장으로 망망대해에서 몇 일간 사투를 벌이다 오우꾸지해안선에서 일본해안 보안청 배에 이끌리어 영해 침범의 올가미로 이즈하라 구치소 수감 45일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강제로 추방된 일도 있다는 자료를 보았다, 우리나라에는 최초로 1883년 3월 봉천여 조선변민 교역장정 24개조와 한일 통상장정 및 해관 세칙이
1883년 7월25일 저녁 6시에 체결되어 당시 청국 상인들이 엉성한 항만관리 약점을 이용하여 밀수를 자행, 단속하는 인천 해관 습격은 물론 통상외교, 통화산업으로 다방면에 심각한 피해를 주던 이들을 단속하기위한 해관이 1883년 5월에 창설된다. 여기에 한국관세 수입담보 및 탁지부고문 총세무사 해관에 일본인 1인과 고문관 파견을 하기로 하고
고종 황제는 1882년 11월 뭴렌 도르프(mollendoff) 독일 영사관 부영사 출신을 임명한다. 1885년 6월 청국이 한,청 전선 조약체결하고 청국에서는 화전국의 시공을 맡고 최초로 전화선 설치공사를 하도록 한 다, 1887년 서울에 점포는 45곳이 있었는데 고문관은 1894년 7월 청일전쟁과 임오군란이 끝난 후
초대 총무 세무사로 고종 임금 접견 시 뭴렌도르프는 청나라인 리 홍장 소개로 고종 임금을 접견하는데, 그가 고종 임금 접견 시 조선왕을 뵐 때는 조선식으로 큰절을 세 번 하고 안경 벗는 일을 잊지 말아야한다는, 리 홍장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간 고종황제는 안경을 끼고 왕을 접견하는 외국 사신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관행을 통과한다.
그 후에 그는 조선인 하인을 고용하고 내외고관초대나 가든파티까지 참석하고 초헌(종2품) 이상의 고관이 타는 사람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녔다. 어느 시대나 반대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고 여기 왕실에도 있지만 내일을 크게 침해할 만큼 크지 못했다, 1894년 청 일 전쟁 시 인천에는 일본인 5000명이 살고 있었는데,
한성이었던 서울인구는 30만 명이었다. 일본인들로 구성된 왜상들이 노출 병으로 방탕 성 때문에 조선 사람들이 왜상을 기피해서 장사가 잘 안 되었기에 격자문 유리를 달아 밖을 내다보고 점포 앞에는 조선 사람을 내세워 장사했다, 1896년 8월 김 구 선생이 민비왕후 시해 일본인 범인을 잡아 죽인 죄로 인천감옥에서 사형수로 있었다,
사형을 집행하기 직전 감형 사실을 전화로 고종 황제가 감 일등급을 시킬 때 이 전화를 활용하고, 1898년 3월 영국함대 8척을 인천항에 입항 영국 해병대가 입경했다, 우리나라 최초 전화선로 개통작업은 청나라 사람들이 인천에서 부터 시작했고, 당시 전화가설에 참여했던 화전국원이 전화선 가설에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다른 물품들을 들여와 밀수에 주도하기도 했으나,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함으로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1906년 1월 통감부정치로 한국해관의 청나라의 운영권이 일본 정부에 귀속되어, 1906년 일본 통감정치가 시작되었다,
1, 최초 우리나라 관세법 제정과 변천과정
경의선 철도업무시작은 물동량과 교역이 한선을 중심으로 인천항을 이용했고 인천, 부산, 원산, 진남포가 조선 육접국경 관세령으로 1913년 월드물류32로 물류를 취급했다, 당시 1904년 만주철도 운영과 만주국 탄생이 되고
당시에 한국인들은 자본도 미약하거니와 상술에도 일본인의 적수가 될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이 처음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농지를 구입할 적에는 논문서를 가져오면 공짜로 몇 년 농사를 지어먹게 하게나 헐값을 주고 농지를 거저사고 몇 년이 지나기 전에 소작료를 계속 올리는 방법으로 결국은 식량조차 전부 가져가 옥구농민 항쟁사건까지 발생케 하고
군산항을 통해 년 간 1920년경에는 30여만 가마의 쌀을 3000톤 배로 군산선에 열차 150량을 연결해 가져가고, 1930년대까지 호남선 철도는 일본으로 실려 가는 쌀부대가 초만원이었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패망하고, 1945년 9월 8일까지 일본인 직원은 잔무정리를 기화로 야간에 기밀문서를 소각하기도 했다.
군산에서 일제징용으로 증발된 사람들이 대기하고 군산역에서 일본으로 징용을 출발하려고 하는데 전쟁이 끝나서 일본에 안가도 된다 해서, 불안한 몇날을 보낸 사실이 구전으로 알려졌다. 나라가 해방이 되고 조국재건의 의욕이 불안한 정국을 주도할 때, 1946년 여름은 중국과 남방에서 전쟁터에서 귀환하는 선편에 콜레라가 전염 인천 부산은 물론 전국에 크게 번지고, 1만 여명 환자발생과, 수 천 명 사망한시기가 있었다,
1947년 8월25일 미군정 법령 제149호로 대외무역규칙이 만들어지고, 서울 인천, 군산, 목포, 제주, 부산, 묵호 등 7개 세관이 만들어지고. 세관 업무를 시작했으나 마땅한 세관원의 제복이 없어, 세관제복은 미군고문관 주선으로 미군 복. 내의를 지급받아 관복으로 개조해 입 었 다, 러 취 미군정 장관은 한국 사람들은 쌀만 먹어서 쌀 기근이 생긴 다, 고기도 먹어라 하는 장군 성명에서 웃음거리가 된 일도 있었고.
미국식 일방적인 행정을 증명하는 유명한 이야기다, 군산세관 3대 엄 승환 세관장은 (1947년 ~ 1949년)까지 근무를 했고, 그는본부 4과장 (감정과장) 임명을 받아 세율 표 작성, 세율안 배정의 1949년 2월 9일부터 법률 제19호 세관관서 설치법 시행령으로, 인천, 부산, 서울, 군산, 목포, 여수, 마산, 제주, 묵호 9개 세관으로 만들었다,
세율 안을 만들어 국회에 보내 토론 하던 중 시계의 세율이 높게 배정되자, 대한민국 초기에 시계를 찬 사람은 그 시계가 사치품으로 보여 지금의 자동차 고급차를 처음으로 산 사람의 구분 되는 격 이였기에, 장택상 의원이 일어서면서 양복조끼에서 금제 회중시계를 꺼내들고 나는 평생시계를 안차고는 못산다 하면서, 사치품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야, 문화인의 필수품이야 이것을 사치품이라고 보는 것은, 재무 당국자가 무식한 소치야 적어도 50% 인하해야 해요 하면서
이의신청을 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군산 세관에는 1947년 12월 중순 상해방면에서 중국무역선 5척으로 면포, 비단, 설탕, 염료, 사카린 등을 실어 군산항에 입항, 당시 군산시장 박 모, 비릇 해 무역협회 간부인 조모, 권모, 정모, 등이 무역선단을 위해 환영연 베풀어 주는 등 야단 법 석 를 떨었다,
지방 유지들은 시장과 일부 권력 기관을 동원 “ 군산항의 발전을 위해 세관에 대해 관세를 잘 봐 달라고 압력을 행사해 세관에서 본부의 승인이 있어야 통관을 해주겠다고 했더니 위조통관서류를 제시해 검찰에 고발까지 하고. 결국 군정 법령에서 종가 10%로 되어 있다는 서신과 적당히 통관 시켜줄 것을 부탁해왔다. 그런데도 세관은 끝까지 추적해 반절만 우리 농, 수산물과 바꾸는 무역을 하기로 하고 통관을 시키고
인천까지 뒤 쫒아가 배를 몰아내기도 한 사실이 있다한다, 우리 문화 역사를 보존키 위해 군산세관 61대 방 길남 전 세관장은 항만청에서 부잔교를 철거하는데 부잔교 철거가 너무 가슴이 아팟고, 그는 구 군산 세관만이라도 헐지 못 하도록 실무자들을 설득하고 토목공사 계약까지 끝난 상태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원형 보존토록 했다 한 다,
구세관의 옛 건물이 관광명소가 된 지금 부잔교 목제로 위로 솟 앗 던 자료 사진을 2010년 6월초까지 구하고 있다, 더 아쉬운 건 옥탑전망대 철거가 새 건물 터파기 행사계약 철거 중 중단했으나 결국은 신청사 마련 때문에 헐어졌다 한다.
해방 후 미곡이 부족한 일본에서는 미곡을 밀수입 하면서 년 간 8만석 쌀을 밀수해갔고, 해태, 수산물, 마른새우를 가져갔고, 일본에서 가져온 남한의 밀수품은 화장품, 학용품, 양품, 옷감, 기계부품을, 북한에서는 전기 공급 댓가로 남측에서는 광목, 약품, 전선, 기계부품을 보냈고 북한에서는 카바이트, 비누, 청어, 명태를 남한으로 교역했다.
내가 참여해본 문화관광 해설은 방문하는 관광객 수준에 따라 물 흐르듯이 스토리텔링을 해서 사실을 말하고 다시 한 번 방문케 하는 묘미가 있어야지 한 번에 다 해결하고 이해 시키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프랑스를 방문 했을 적에 나이가 드신 여성 해설사가 몽마르트 언덕에서 땀을 흘려가면서 열심히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해주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해가면서 부족한 자료는 보완하고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의견을 모아가면서 아름답고 훌륭한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자료가 전라북도 문화관광 해설사회를 중심으로 가득히 담길 그날을 기대해본다....
◎ 2010,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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