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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영웅 해군의 백두산함

작성자 ***

작성일15.07.01

조회수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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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6.25전쟁 영웅 해군의 백두산함

 

[위클리공감] 글쓴이 6·25 참전용사 최영섭 고문 기사입력 2015.06.25

 

“해군 첫 전투함 백두산함, 동해 바다 수호신이었지”

 

태극기 걸린 집을 찾으라 했다. “우리 집은 일 년 열두 달 태극기를 걸어.” 국경일이 아닌 6월 15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의 한 아파트 21층 베란다 창밖에 걸린 태극기는 붉고 푸른 태극이 선명했다.

 

최영섭(87)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예비역 대령) 댁을 그렇게 찾았다. 6·25전쟁 당시 최 고문은 갓 독립을 이뤄 제대로 된 전투함 한 척 없던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해군 장병들이 십시일반 모은 월급과 해군 부인들이 바자회, 삯바느질로 더한 돈으로 구입한 백두산함의 갑판사관 겸 항해사, 포술사였다. 백두산함으로 치른 6·25전쟁 첫 해전이자 국운을 가른 전승으로 기록된 대한해협해전의 산증인이다.

 

그는 정전협정 60년을 맞이한 2013년 바다에서 함께 생사를 같이하며 싸웠던 전우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6·25 바다의 전우들>이란 제목의 회상록을 펴냈다. 이 회상록 표지엔 작은 글씨로 ‘해군소위 최영섭 지음’이라고 적혀 있다. 전후 백두산함 함장, 충무함 함장, 제51전대 사령관까지 지내고 예편했고,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지금도 그의 가슴속은 포연이 번지던 조국의 푸른 바다를 지키던 붉은 심장의 최 소위 그대로인 듯했다.

 

“우리 수군이 대견하군. 믿음직해.” 백두산함에 탑승한 이승만 대통령이 병사들 어깨를 두드리며 수군(水軍)이라고 했어. 그때가 1950년 6월 12일이야. 이 대통령이 해군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산 백두산함을 직접 보기 원해서 진해에서 이 대통령을 모시고 부산까지 갔어. 가덕도를 돌아 부산으로 향할 때 대통령 모시고 3인치 주포의 사격훈련을 했어. 모의탄이지. 나라가 가난해 공무원 월급도 제대로 못 주던 시절이니까.

 

국가 재정으로는 군함 구입을 엄두도 못 낼 형편인 시절이라 해군이 자체적으로 군함을 구입하자고 월급에서 5~10% 갹출을 했어. 그때 내 월급이 1만 원인데, 두 달을 그리 냈지. 해군부인회에서는 뜨개질을 한 수예품을 모아 팔고 삯바느질에 의복 세탁까지 해가며 돈을 보탰어.

 

석 달 만에 모인 1만5000달러를 들고 손원일 제독(초대 해군참모총장)이 이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어. “우리에게 대포 달린 군함이 있어야겠는데,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돈을 좀 모았습니다.” 이 대통령이 “손 제독을 대할 면목이 없구만” 하며 4만5000달러를 보태줬지. 그래서 백두산함을 먼저 1만8000달러에 구입하고, 나머지 돈이 오는 대로 3척을 더 샀어.

 

美 연습선에 무기 장착, 한국군 첫 전투함으로

 

백두산함 pc-701은 미국 해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건조한 pc형(구잠함 : 적의 잠수함 정찰이 주 임무였던 군함) 361척 중 하나였어. 1944년 취역했다 전쟁이 끝나면서 퇴역해 무기 다 떼어내고 뉴욕주에서 해양대학교 실습선으로 쓰이던 배야. 우리가 먼저 배 이름을 백두산함이라고 정해두었는데, 알고 보니 그 학교에서 실습선에 붙인 이름이 ‘화이트헤드 소위(ensign whitehead)’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사망한 졸업생을 기념해 붙인 것인데, 기이하게 백두산함과 영어의 뜻이 일치하는 인연을 가진 거야.

 

이 배를 구입한 게 1949년 10월 17일인데, 미 해군과 무기 장착에 대한 약속까지 마친 상황에서 미국 정부에서 의회 승인을 받는 데 석달이 걸렸어. 그래서 그해 12월 26일 뉴욕 맨해튼 섬 부두에서 태극기를 올리고 하와이로 향했지. 호놀룰루항에서 1950년 3월 16일 3인치 포를 장착하고 딱 사흘 연습한 뒤 출발했지. 그리고 괌에 들러 포탄 100발을 사서 싣고 진해항에 들어온 게 그해 4월 10일이야.

 

진해항에서 한 달 동안 시뻘겋게 녹슨 선체를 닦았지. 다시 칠을해 단장하고 나니 대통령뿐만 아니라 각지의 해군 장병들이 백두산함을 보고 싶어 했어. 자신들이 갹출한 돈으로 구매한 대포 달린 군함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게지. 부산, 묵호, 인천, 군산, 목포에 있는 해군 경비부를 순회해 다시 진해에 돌아온 게 6월 24일 밤 11시 30분이야.

 

일요일인 다음 날 아침 7시에 일어나 묵은 빨래를 하고 나니 오전 10시 출동명령이 떨어졌어. 동해안에 인민군 군대가 침공해 상륙 중이었어. 연료, 물, 식량을 싣고 오후 3시 최용남 함장 지휘 아래 갑판의 항해 당직사관을 맡아 진해항을 출항했지.

 

강원도 해안으로 향해 부산을 지나 울산 앞바다에서 북상 중이던 이날 오후 8시 10분경 우현견시 조병호의 목소리가 울렸어. “우현 45도, 수평선 검은 연기 보임.” 쌍안경으로 수평선을 보니 검은 연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남진 중이란 뜻이지. 가까이 다가가 저녁 9시 반경 시커멓게 칠한 괴선박을 확인했어. “적이다.” 본능적으로 느껴졌어.

 

백두산함의 두 배는 됐지. 백두산함이 접근하니 이리저리 침로를 바꾸며 계속 남하하는데, 선박의 어디에도 선명도 안 보이고 국기도 달지 않았어. 국제 공통 통신신호에도 응답을 안 했지. 해는 졌지만 하지(夏至) 때라 희미하게나마 괴선박에 탑재된 무기들과 탑승자들이 보였어. 생각했지. ‘어둠 속에서 이마와 코가 허옇게 빛나면 로스케(러시아인)다. 그런데 빛나지 않으니 로스케는 아니고, 일본은 패망해 해군이 없고, 중공군은 장제스랑 싸우기 바쁘니 저 배는 분명 인민군 배다.’

 

싸우자! 싸우자!

냉수 건배 후 두려움 없는 전투

 

괴선박이랑 추격전을 벌인 끝에 백두산함에서는 공격하기로 결단을 내렸어. 당시엔 상대 국적도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대포와 기관포로 중무장한 선박엔 완전무장한 군인 600여 명이 탑승해 남진중이었던 거야. 그날 새벽에 동해안 여러 곳으로 인민군이 상륙했고, 이 괴선박은 계속해서 부산 지역에 상륙해 전선을 이뤄 우리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이 분명했지. 해군본부에서도 격침 명령이 떨어졌어. 26일 0시 10분경.

 

싸우게 되면 생사의 갈림길은 종이 한 장이야. 격침 명령 30분 전에 백두산함 장교 8명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최용남 함장이 이러더군. “귀관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과 같이 우리가 추격해온 괴선박은 공산당 군함이 틀림없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그리고 덧붙였어. “전투에 돌입하면 이게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 그냥 ‘잘싸우자’ 이러자니 심심하잖아. 그래서 당번병에게 물 떠오라 해서 컵에 따라 냉수 건배를 했지. “싸우자! 싸우자!”

 

난 그리고 포갑부(함정의 무기 담당 부서)로 가서 부하들에게 내복을 갈아입으라 했어. 죽은 시신에서 냄새 나면 안 되겠다 생각했지.

 

두려웠냐고? 전혀 두렵지 않았어. 우리에게 지킬 나라가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았거든. 나는 열세 살 때 부모님 따라 일본에 가 도쿄에서 공부를 해서 육체적 핍박은 받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핍박을 많이 받았지. 한국에 살던 사람은 더했어.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화 교육이 무지 많아서 아침에 학교 가면 일본 황궁 과 일본 국기를 향해 황국 국민의 선서를 하고 아주 요란 했다구. 오히려 일본에 가보니 일본화 교육은 없었고 우리 역사에 대한 책도 오히려 일본 도서관에 많았어.

 

게다가 백두산함은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이야. 우리 손으로 마련했어. 백두산함 하사관과 병 모두 가장 우수한 인재들을 골라 태웠어. 그러니 해군 유일의 전투함에 승선했다는 자부심들이 대단했지.

 

백두산함 장병들 중에는 이북 출신들이 많았어. 나도 도쿄에서 5년을 살다 광복을 맞아 귀국해 북한으로 갔는데, 이북의 실정을 겪고는 온 가족이 남한으로 내려왔지. 해군사관학교 내 동기생이자 백두산함에도 같이 탄 김종식이도 평양 출신이고. 우리는 이북을 알았거든. 이북 내에서 벌어진 만행들, 남한 점령의 야욕을 직접 보았기에 언젠가 전쟁이 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포탄 30여 발 발사… 적선 함교와 마스트 제압

 

전투 명령이 떨어지고 각자 전투 위치로 달려갔지. 적함의 좌현 후미 3마일(약 5.4km) 거리에 접근했을 때 3인치 포의 첫 발이 날아가면서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확 풀렸어. 모의탄만 쏴봤지, 실탄 사격이 처음이잖아. 과연 제대로 날아갈까 걱정했거든.

 

적함과의 거리를 3000야드(약 2.7km)까지 좁히고 비 오듯 적탄이 날아오는 가운데 열난 총신을 냉수 적신 수건으로 식히면서 포격전이 20여 분 계속됐는데, 최용남 함장이 묻더군. “포탄 몇 발 쐈나?” 우리가 가진 포탄은 모두 100발인데 이미 30발을 쐈어. 포탄을 다 쏴버리면 전투도 중단해야 해. 적함이 부산에 상륙할 경우 피해는 막심할 거라 생각했지. 결국 함장이 결단을 내렸어. 적함에 1000야드(약 914m)까지 접근해 적 함교와 기관실에 포격을 집중하기로.

 

백두산함이 최고 속력으로 적함을 향해 돌진하며 쏜 포탄이 드디어 적선의 함교를 폭파하고 적함 마스트가 꺾여나갔어. 백두산함에선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어. 새벽 1시 10분경 적함과의 거리가 300야드(약 274m)까지 좁혀졌는데, 이때 적함에서 발사된 포탄 한 발이 백두산함의 조타실을 뚫었고, 다른 포탄이 주포 갑판에 떨어졌어.

 

적 함정 격침에만 집중하다 보니 함미의 적 주포가 손상되지 않은 걸 놓친 게야. 조타수 김창학, 장전수 전병익이 쓰러졌어. 군의관 김인현 중위가 심한 뱃멀미로 목에 깡통을 단 채 응급수술을 했지만 피를 많이 흘린 두 병사의 상태를 돌이키지 못했지. 1시 30분 적함 격침 소식이 전해졌어. 두 병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한 말이 “대 한민국…”. 지금도 그들이 마저 하지 못한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을 지켜다오” 소리가 들리는 듯해.

 

이후 백두산함에 탑승해 인천철수작전, 여수철수작전,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가했고 1년 반 뒤 다른 업무를 맡았지. 우리가 강원도로 북상하다 우연히 발견한 적함을 격침시킨 대한해협해전 승전은 우리 해군 첫 전투의 승리이자 6·25전쟁에서 우리 군의 첫 승리의 기록이야.

 

또한 유엔군의 병력과 군수물자가 원활하게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해상 교통로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 미군이 부산항에 도착한 것이 대한해협해전 5일 뒤인 7월 1일이었고, 이후 부산항은 연인원 500만 명, 군수물자 5200만 톤, 유류 2200만 톤을 수송하는 핵심 항구가 됐지. 그때 적함이 부산항에 들어왔다고 생각 해봐. 역사가 바뀌었을 거야.

 

민간 함정 문산함 선장 꼭 찾아내 기억했으면 해

 

기자, 이걸 좀 꼭 다뤄줘. 백두산함이 참가한 여수철수작전에 상륙정으로 차출됐던 민간 함정 문산함 선장이 누구인지 지금이라도 꼭 찾아야 해. 쏟아지는 적의 탄알 속에서 해상으로 후퇴하는 경찰관들을 기다렸다가 다 태우고 후퇴하고, 다음에는 포항 북쪽 장사동 해안 전투에 참가했다 선원 6명과 함께 모두 전사했어. 장사동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이야. 이분들이 누구인지 꼭 찾아내야 해. 이런 분들 같은 이름 없는 영웅들을 같이 기억하고 기려야 해. 이런 분들을 기억하고 기리지 않는다면 누가 앞으로 국가와 공동체의 위기에 나서주겠나.

 

전쟁이 벌어지면 민간인들과 민간 선박들도 다 동원돼. 육상전에서는 지게부대들이 보급품을 지고 날랐어. 부산 시민들은 전국에서 몰려든 200만 피난민들에게 지낼 곳을 내어주고 김치, 된장, 고추장을 나누며 보살폈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란 노랫말에는 부산 시민들의 끈끈한 정이 담겨 있어. ‘도라무통’을 반 자르면 의자가 되고 그대로 놓으면 테이블이 되는 시절이었지.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함께 어려움을 극복한 정이 우리를 살린 거야.

 

백두산함 승조원이 모두 76명인데, 정전 60주년에 20명이더니 지금은 14명만 생존해 있어. 우리 세대는 얼마 남지 않았어. 난 20년간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을 하면서 강의를 해. 아이들이 아니라 교장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내 스피커가 되어달라는 의미에서지. 교장들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것이 아이들의 국가 혼(魂)을 키워달라는 것이야. 우리가 지금 단군 이래 최고의 경제적 성과를 누리고 있는 기적의 원천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국가 혼을 심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해.

 

대한민국이 얼마나 귀한 나라인가. 6·25전쟁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보전됐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국민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야. 엄마가 내어주는 쌈을 먹고 싶어 하던 어린 소년병들까지 나라를 지키다 죽어갔어. 아이도 어른도 모두 대한민국을 지키려 했어. 그래서 대한민국이 살아난 거야.

 

예전 월남은 월맹보다 20배 우세한 경제력을 갖고도 하루 세 끼를 못 먹던 월맹에 망했어. 제 나라 국민이 제 나라를 지키려 하지 않으면 도와주려는 나라가 없어. 6·25전쟁 때 세계 91개국 중 67개국이 대한민국 편에 섰어. 남녀노소 없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굳은 정신을 본 67개국이 한국 옆에 섰다니까. 이게 대한민국의 오늘이 된 역사야.

 

이후 세월도 눈물 없이 표현할 수가 없어. 서독으로 간 광부와 호사들, 월남 파병 병사들이 달러를 벌어왔어. 원양어선 타고 고기잡이 하러 간 사람들도 죽음의 위험을 견뎌내며 달러를 보냈지. 게 한국에서 공장이 됐어. 밤낮 없이 일하던 구로공단, 그래서 수출을 했고 오늘이 된 거야.

 

매년 6월 26일 전승 행사

 

대한민국 국민 대단한 거야.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부탁 좀 하지. 우리 민족이 백년, 천년 살 대한민국을 잘 가꿔야 해. 애국심 말하는 나 같은 늙은이 고리타분하다, 그럴지 모르지만 젊은이 여러분 자신을 위해, 또 자손들을 위해 대한민국이란 나라 소중히 잘 가꿔줘.

 

최영섭 고문은 대한해협해전 등의 전공을 인정받아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 등 20여 개의 훈·포장을 받고 1968년 전역한 후 최근에는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으로 활동하며 국가 혼을 심는 교육과 백두산함 전사자들을 기리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가 가진 백두산함 전우수첩에는 주소며 연락처, 배우자 이름이 빼곡하다. 그 위로 몇 년 몇 월 사망했다는 빨간 글씨가 적혀 있다. 이 빨간 글씨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백두산함은 1959년 7월 퇴역했다. 선체가 해체된 뒤 백두산함 돛대는 해군사관학교 내에 남아 2010년 등록문화재(제463호)로 지정됐다. 해마다 부산에서는 매년 6월 26일 대한해협해전 전승 행사가 열린다.

 

최 고문의 서재에는 빛이 바래 얼굴선마저 희미해 보이는 옛 동기들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놓여 있다. “둘은 6·25 때 죽은 해군사관학교 동기이고, 다른 둘은 백두산함의 김창학, 전병익이야. 기억해줘야 하잖아, 동기이고 전우니까….” 사진마저 흐려진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노병의 기억은 스물 몇 살의 앳된 시절을, 국가의 위기 앞 에 아낌없이 불사른 청춘들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첨부 백두산함 사진)

 

자료정리

대한해외참전전우회 창원시지회 사무국장

겸, 보훈지킴이 창원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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