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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 007편 격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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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6.03.27

조회수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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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kal 007편 여객기 격추사건


 


[네이버불로그] (위키피디아에서 발췌) 기사입력 : 2015.12.25. 00:10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korean air lines 007 shootdown)



1983년 9월1일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jfk)을 출발, 앵커리지(anc)를 경유하여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 소속 007편 여객기(b747-230b, hl7442)가 비행 중 사할린 근처 모네론 섬 부근 상공에서 소련의 su-15tm 요격기에게 격추당해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숨졌다.


 


007편에는 총 246명의 승객과 23명의 승무원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이 중에는 미국 하원 의원인 로렌스 맥도널드(lawrence mcdonald)도 탑승했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소련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역시 소련 정부에 항의하였다. 다만 외교 채널이 없어서 직접 항의하지 못하고 미국을 통해 항의했으며, 사건 당시 정부는 자국민 수 백명이 몰살당했음에도 강대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대한항공 007기가 제3국(물론 소련) 전투기에게 격추되었다."라고 발표했다.


 


9월2일부터 3일간 대한민국에서는 특별애도기간을 갖고 관공서와 가정에서 조기를 게양했으며, 정부는 사고발생 직후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청, 격추에 대한 항의를 했고 각국은 소련 항공기에 대한 운항 중지, 모스크바 취항 거부 등의 제재조치를 했다.


 


9월5일 유가족 53명을 태운 훼리호가 사고현장에 갔지만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일반적으로 김현희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과 함께 양대 kal기 사건으로 회자되곤 한다.


 


또한, 대한민국 내 항공사고 사상 사상자 1위이며, 세계 항공사고 사망자 12위를 기록, 또한 냉전 사상 최악의 사건이기도 하다. (여객기 항로 사진 첨부 참조)


 


시간별 상황


 


* kal 007기는 나침방위 245도를 선택하여 비행


* 소련측 캄차카 반도 상공 1차 요격 시도 실패


* 17:27 : 사할린 지역 사령관은 캄차카 상공 에서 영공침범 보고 수령.


* 17:45 : 부터 사할린 소재 레이더에 007기 인식


* 17:52 : 동 항공기가 rc-135인지 여부에 대해 다시 의문이 제기


* 17:42과 17:54 : 두대의 su-15 전투기가출동


* 17:58 : 805전투기에 007기 추적 및 식별 명령


* 18:09 : 격추명령이 관제사에게 전달


* 18:16 : 007기 재차 소련 영공 진입


* 18:22 : 동 항공기 격추 재차 지시


* 18:25 : 공대공 미사일 2기 발사


 


제목 : 20년 만에 밝히는 83년 kal기 격추사건의 실체


 


[네이버불로그] 기사입력 : 2016.01.03. 16:20


http://www.up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308


 


왜 kal 007기는 최단거리 노선을 택했고, 소련 공군의 합법적 지시를 무시했나?


kal기 격추 사건이 일어난 지 1일로 20주년을 맞았다. 최근 상파울루 대학교 후카이 박사는 kal기 격추사건이 미국과 한국 정보부가 민간여객기를 활용해 첩보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터진 것이라는 소설을 내기도 했다.


 


그 동안 이 사건에 대한 억측과 편파적인 해석만 난무했지 종합적이고 균형 있는 해석은 없었기에 더더욱 20주기가 쓸쓸해 보인다.


 


러시아사를 전공한 명지대 강규형 교수가 러시아와 미국의 문서 등을 토대로 kal기 사건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면서, 동시에 냉전사의 흐름에서 이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재조명했다.[편집자 주]


 


kal기 격추사건은 예고된 비극


1983년 9월 1일 kal기 격추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2차 냉전(the second cold war)‘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기였다. 80년 말 선거에서 승리한 보수강경 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은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미국의 소련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추구하는 정책을 펴나갔고 소련은 여기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kal기 사건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지속돼온 항공정찰이 수반된 북서태평양지역의 군사적 경쟁구도가 가져온 예고된 비극이었다.


 


국제정세가 초긴장으로 흐르고 있을 때 한국의 kal007기는 너무나 부주의하게 소련의 군사요충지 위를 날고 있었고 과민상태에 있던 소련 공군은 여기에 대해 과잉대응을 함으로서 대형비극이 야기됐던 것이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은 즉각 소련의 행동에 “테러행위”,“반인륜 범죄” “야만행위”라고 맹공을 가했고, 소련은 처음에 격추사실 자체를 부인하다가 kal기가 미국을 위한 첩보행위를 했다고 역으로 맹비난했다.


 


당시의 긴장상태와 당시 미국이 실제로 사고 장소 부근에서 항공첩보활동을 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소련의 격추행위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안드로포프가 사후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사과를 거부한 것과 레이건이 당시 정보를 통해 소련이 미국첩보기로 오인하고 격추한 것을 알고서도 민간항공기인줄 알고 격추했다고 소련을 비난하며 사실을 왜곡한 행동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소련은 미국의 의도적 도발로 인식


또한 소련 당국은 나중에 그것이 한국 민간항공기인 줄 알고 나서도 이 비행기가 소련의 극동지역레이더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도발된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소련의 주미대사였던 아나톨리 도브리닌은 사건발생시 크리미아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중이라 곧바로 안드로포프 집무실로 긴급히 호출됐기에 당시 안드로포프의 인식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안드로포프는 “우리 군대가 심각한 실수로 민항기를 격추시켰으며, 이 아수라장 속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하며, 그 동안 쌓아왔던 관계개선 노력이 “저 머xx같은 장군들 때문에”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안드로포프는 이 사건에 대해 사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의 권유로 그것을 포기했다.


 


이러한 결정은 일단 소련의 국제적 위신과 국내적인 파장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즉 kal기가 불법적으로 소련영공을 비행했으나 소련공군의 실수로 격추된 것에 대해 공개적이며 정중하게 사과하지 못한 것은 소련의 큰 실수였으며, 의도적으로 소련이 민간항공기를 격추했다고 비난한 레이건의 태도도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kal기 소 영공 진입 당시 소련 공군 레이더 시스템 보수중


또한 당시 소련공군이 이러한 실수를 한 이유 중의 하나가 당시 소련 공군의 사할린과 캄차카반도 상공의 레이더 시스템이 보수 중이었기 때문에 외부의 항공기가 한 시간동안 아무런 제재 없이 군사적으로 매우 민감한 소련상공을 날 수 있었고 이 비행기가 공해상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특히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미국 측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사건 이후 상원 외교위 비공개 회의에서 nsa가 소련조종사가 문제의 비행물체가 민항기인 것을 몰랐다는 것을 보고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 사건으로 촉발된 反소련 분위기를 이용하려 했던 측면이 강했다.


 


서방측에서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중 오직 한사람, 캐나다 총리 피에르 트뤼도 만이 소련이 고의로 민항기를 격추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혔으나 당시의 반소적 분위기 속에 묻혀버렸다. 훗날 트뤼도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했으며, 소련은 책임을 회피하고 사과하기를 거부했기에 상황이 악화됐다고 해석하고 있다.


 


소련이 해체되고 난 후 러시아의「이즈베스치아」(izvestiia)지가 1990년과 92년 사이에 행한 조사에서 결론적으로 이 사건이 비극적인 사고였으며, 패닉상태에 있던 소련공군이 과잉대응을 한 것으로 정리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kal기 교신 내용, 미국에 의해 편집된 것


아마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지도 모르는 의문은 당시 kal기의 행태였다. “목표물은 파괴됐다”라는 말로 유명해진 테이프, 즉 미국정부관계자가 공개한 격추기 조종사와 관제소와의 교신내용은 매우 선택적으로 편집된 것이었다.


 


그 이후 밝혀진 교신의 전 내용을 살펴보면 소련기는 모든 국제 협약의 내용을 따르고 있었다. kal기에 대해 모든 사전 조치를 취하고 순응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였고 최후로 경고사격을 했는데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공해상으로 빠져나가자 소련공군은 그 비행체에 대해 격추명령을 내린 것이다.


 


kal기 조종사는 사실상 처음부터 최단거리 노선을 택했기에 비행기가 소련 영공 내에 들어갔다는 것을 모를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kal 기장은 계속 자신이 정상항로를 밟고 있다고 지상관제소에 보고하고 있었으며, 나중에 소련기의 합법적인 경고 시그널에 대해 철저히 무시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태전개였다.


 


cnn, kal기 비행단축 위해 소련영공 날았을 가능성도 제기


이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의문이 될지도 모르지만 냉전시대를 집대성한 『cnn』의 다큐멘타리와 책은 kal기가 지름길을 택해 의도적으로 소련영공을 날았을 가능성까지도 제기하고 있다.


 


kal격추 이후 더 심각한 긴장상태에 빠진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소련이었다. 여러 증거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소련은 미국과 서방이 선제공격을 할지도 모른다는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됐다.


 


특히 소련을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83년 11월 2일부터 11일 사이에 실시됐던 대규모 nato군사훈련인 에이블 아처 83(able archer 83)이었다. 이 훈련은 나토가 핵전쟁에 대비한 훈련이었는데, 소련은 이것이 소련에 대한 핵 선제공격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러한 미-소간의 갈등고조는 ‘이룰 수 없는 평화’로서의 냉전의 성격을 보여주는 예이다. 한국국적 민항기의 실수로 유발된 하나의 사건이 국제적인 성격을 띄면서 냉전체제의 긴장이 점증되어갔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동-서 양측은 상호 체제의 공고화와 합리화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이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상호이해 속에서 조금 더 합리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었던 사건이 필요이상으로 확대되고 갈등구조를 심화시킨 것은 전형적으로 ‘이룰 수 없는 평화’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소련은 격추자체를 처음에는 부인하고 나중에는 의례적인 사과도 하지 않음으로서 필요 이상으로 비난을 받았고 레이건 행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성공적인 국제적 반소 프로파간다 캠페인을 벌이고 군비증강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굳히는데 성공했다.


 


kal기 사건의 해결과정, 제2 냉전의 새로운 대전환


그러나 1983년은 쿠바사태가 있었던 1962년 다음으로 냉전사에 있어서 긴장이 고조됐던 시기였지만 역설적으로 돈 오버도퍼가 얘기한 “냉전없는 새로운 세계”로의 “대전환(the turn)”을 이룬 시작을 알린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레이건은 말은 거칠게 했으나 행동은 자제한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격한 비난을 하고 난 후 레이건의 9월 5일 공식 tv연설은 소련의 사과와 희생자 보상 등 예상보다 온건한 내용이었으며, 무기감축노력에 대한 재확인의 내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백악관과 nsc 내에서 미-소외교관계 단절, 소련 영사관 폐쇄, 군사행동고려 등의 강경정책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는 인사들도 있었지만 레이건행정부는 온건한 대응책을 내놓았다는 점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도브리닌에 따르면 안드로포프의 “프라우다 성명” 직후 레이건은 키신저를 백악관으로 초빙해 자문을 구했으며, 키신저도 “양국 관계를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으면 극도의 절제력을 보이고 연설 시에 반소적인 공격성을 완화할 것”을 권고했다.


 


당시 안보담당 보좌관이었던 로버트 맥팔레인도 소련을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위에 언급한 에이블 아처 83훈련에 원래 참여하기로 한 대통령 레이건, 부통령 조지 부시, 국방장관 캐스퍼 와인버거, 그리고 미국 합참 수뇌부의 불참석을 종용했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이 훈련에의 불참을 결정했다.


 


84년 1월16일 레이건은 미래의 미-소 관계에 대해 놀랍도록 우호적인 연설을 했고, 슐츠는 그로미코에게 레이건의 의도는 진지한 것이라는 설명을 했으며, 안드로포프는 여기에 대해 양측 정상사이에 대화를 진전시키고 싶다는 비밀서한을 보냈다.


 


소련 측에서도 이미 83년 9월 8일 그로미코의 연설에서 “현재 세계의 제일 큰 문제는 핵전쟁을 피하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었고 비록 초긴장상태 하에서도 관계개선 노력을 계속 기울여왔다.


 


83년 11월 5일 볼셰비키 혁명 기념식에서 심각한 건강상태에 있던 안드로포프 대신 행한 정치국원 그리고리 로마노프의 연설도 비록 미국의 ‘적대적인’ 행동을 비난하고 있지만 “데탕트, 평화공존, 그리고 무기감축의 길”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안드로포프는 그래도 약간의 희망이 생긴 가운데 84년 2월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84년 그로미코 외무상의 아들이자 아프리카 연구소 소장이었던 아나톨리 그로미코는 『핵 시대의 신사고』라는 책에서 ss-20미사일의 유럽배치를 포함한 기존 핵 정책에 의문을 제기했다.


 


같은 해 훗날 고르바초프의 과학담당 보좌관이자 레이캬비크 정상회담 멤버가 되는 예브게니 벨리코프와 그의 동료들은 미-소 양측이 500여 개의 이동식 미사일만 보유하는 수준의 핵무기 감축안을 소련 내부적으로 내놓았고 미래의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이 제안을 숙지하게 됐다.


 


이어서 84년 6월에는 소련은 대외적으로 우주에서의 무기를 금지하는 일련의 협상안을 제시했다. 안드로포프 사망 이후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고령의 체르넨코가 소련최고지도자가 됐기에 어떤 의미 있는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무기감축 논의는 계속 진전되었고 젊고 신사고를 가진 고르바초프가 소련지도자가 되면서 세계는 새로운 단계의 협력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84년 9월 그로미코는 미국과의 관계복원을 위한 미국방문을 결행했으며, 레이건의 대선 압승이 결정된 11월에는 미-소 양측이 84년 초에 새로운 무기감축협상을 시작한다는 것을 선언했다.


 


12월에는 떠오르는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영국을 방문할 시에 “소련은 핵미사일에 대한 감축문제에 있어서 ‘과감한 해결’을 추구할 준비가 돼있다”고 선언한다.


 


3개월 후 체르넨코가 사망하면서 늙고 병들고 고리타분한 소련지도부의 시대는 가고 세상은 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kal기 사건을 전후해 생겨난 소련 외교정책변화의 조짐은 냉전체제가 다시 안정되고 나서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 고르바초프의 대내외적인 개혁으로 확대 발전됐다.


 


kal기 격추사건, 2차 냉전체제 해체의 계기


결론적으로 kal격추사건은 2차 냉전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양측의 긴장이 고조됐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냉전체제의 해체라는 싹이 트는데 큰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미 한국전쟁을 통해 양 체제가 터득한 ‘위기를 통한 표준의 구성,’ 즉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전쟁”의 예는 kal기 격추사건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긴장상태가 클라이막스에 다다랐다가 급격히 안정상태로 다다르는 일반적인 현상과 더불어 위기상태에서 양측이 그것을 관리하는(manage) 표준을 터득한 미-소가 다시 한번 그러한 패턴을 보여준 좋은 예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은 아직도 미해결사건이고 우리가 흔히 추측해왔듯이 소련의 일방적인 비인도적인 행위로 일어난 비극은 아니라는 점이다.이 사건은 당시 첨예한 국제정세 속에서 발생한 한국민항기의 “이해할 수 없는”행위에 의해서 격발된 사건이라는 점이다.


 


kal기 격추 사건의 이유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그 사건으로 인해 죄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이 일어났기에 20주년에 기해


그 분들의 명복을 빌어보며 “그 이유”에 대한 재검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료정리(2016-03-07)


대한해외참전전우회 창원시지회 사무국장


겸, 보훈지킴이 창원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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