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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주 최후의 폭도들(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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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7.01.27

조회수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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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4.3 제주폭동 최후의 폭도들(하편) [시스템클럽] 글쓴이 : 비바람 작성일 : 2016-03-28 00:28 6. 최후의 폭도 5인방 남제주군 서귀면 신효리에 공비 2명이 출현한 것은 1955년도 다 저물어가는 11월 13일이었다. 공비 2명이 신효리 민가에 침입하여 운동화 두 켤레를 훔치고 도주하였다. 이 소식은 경찰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경찰에서는 남한 일대의 잔존 공비는 전라북도 덕유산에서 준동하는 4명이 전부라고 발표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22일에는 한림면 귀덕리에서 공비가 민가에 침입, 주인을 총으로 위협하여 양곡 2두를 탈취하고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무장 2명 비무장 2명, 합 4명의 잔비 중에 하나는 국방색 복장에 전투모를 쓴 약 20대 후반 가량의 청년이었고, 하나는 40대로 추정되었다. 이때까지 남아 끈질기게 저항을 벌이던 최후의 제주인민해방군은 5명으로 다음과 같았다. ● 두목 = 김성규(金成奎 중문면 색달리 36세) ● 부두목= 정권수(鄭權洙 구좌면 상도리 출신 38세) ● 오원권(吳元權 구좌면 송당리 39세) ● 변창희(邊昌熙 제주시 이호동 22세) ● 한순애(韓順愛 여자 조천면 와산리 23세) 1956년 4월 3일에는 잔비 1명이 사살되었다. 3일 하오 3시반 경 구좌면 송당리 남방 속칭 체오름 부근에서 잔비를 포착한 경찰이 교전 끝에 1명의 잔비를 사살하였다. 사살된 폭도는 정권수로 알려졌다. 정권수는 흑색 미제 작업복에 차색(茶色) 누비옷 하의를 입고 일본제 철모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정권수는 구좌면 상도리 출신으로 5명의 잔비 중 부두목으로 알려졌다. 정권수가 소지하고 있던 카빈총 1정과 실탄 14발, 탄창 3개, 만년필 1개, 불온문서 1책, 물리학 책 1권 등도 노획했다. 정권수는 4.3초기에 입산하여 만 8년 동안 살인방화를 일삼던 거물급 폭도였다. 1992년에 다랑쉬동굴에서 발견된 시체들도 양민들이 아니라 정권수 휘하의 구좌면당 소속 공비들이었다. 정권수 시체는 정권수의 친척들이 시체인수를 거부하는 바람에 경찰에서 매장했다. 정권수가 사살될 때 같이 동행하고 있던 공비는 오원권과 변창희로 알려졌다. 1955년 11월에 공비들이 출몰했던 서귀면 신효리와 한림읍 귀덕리는 반대 방향에 있었다. 따라서 남은 잔비들은 2명씩 두 팀으로 분산 활동하는 것이 확실시 되었고, 두 팀에는 각각 1정씩의 카빈총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목 김성규와 여비 한순애 팀은 1954년 3월 이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공비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9월 15일이었다. 4명의 공비가 연동의 민가에 침입하여 식량을 약탈하고 소에 싣고 가려다가 소가 말을 안 듣는 바람에 당황한 나머지 주인을 폭행하고 식량만 챙긴 채 도주해버렸다. 한동안 잠잠하던 공비는 1957년 3월 21일 월평동 견월악 지경에서 경찰의 수색에 발견되었다. 공비들이 경찰에 쫓겨 도망가다가 걸음이 느린 한순애가 생포되었다. 한순애의 배낭에는 소형 식기 1개와 모포 1매, 백미와 보리쌀이 4되가량 들어있었다. 한순애는 1951년 봄에 동네 할머니들을 따라 제주읍에 장을 보러 가다가 폭도들에게 붙잡혔다. 폭도들은 할머니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순애만을 산으로 붙잡아가는 바람에 폭도가 되었다. 만 7년 만에 한순애는 공비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로써 한라산에 남아있는 폭도는 남비 3명으로 줄어들었다. 한순애는 최근 공비들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근거지는 일정한 곳이 없으며 깊은 밀림 속에 나무기둥을 세워 모포로 사방을 가려 기거와 식사를 하고, 식량은 수확기인 가을철을 중심으로 밭과 민가에 침입, 곡식을 약탈, 곳곳에 은닉 비축해 두며 때때로 하산 방목하는 우마 등 가축을 포살, 반찬과 육식을 하며 산열매도 따먹는다. 한순애의 진술에 의해 경찰은 나머지 잔비 추적에 나섰다. 3월 29일에는 한라산에서 공비와 교전 끝에 김성규와 현창희를 사살할 수 있었다. 두목 김성규에게는 현상금 100만환이 걸려 있었다. 변창희는 4.3희생자에 등재되어 위패가 봉안된 인물로 변창희는 일급 불량희생자에 해당한다. 김성규와 변창희의 시체는 한라산에 눈이 싸인 바람에 5월이 되어서야 시체를 수습하고 가족에게 인계되었다. 폭동 발발일인 4월 3일을 하루 앞둔 4월 2일 기어이 최후의 폭도 오원권이 생포되었다. 오원권은 그의 고향인 구좌면 송당리 장기부락에서 카빈총을 소지한 채 체포되었다. 이제 한라산에는 단 한 명의 공비도 없었으며, 드디어 만 9년의 4.3폭동에 대단원의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 오원권은 구좌면 송당리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로, 노모와 아내, 생후 8개월의 아들이 있었다. 폭동이 발발하고 공비 소탕을 벌이던 진압대의 포화에 아내를 잃었고, 소개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빈손으로 해안마을로 내려왔다가 다시 먹을 것을 구하러 고향마을로 갔다가 폭도들에게 잡혀 폭도 생활을 하게 된 것이었다. 오원권과 한순애는 서울로 압송되어 치안국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조사를 받아 오던 중 당국의 기소유예라는 관대한 조치를 받고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희망은 고향에서 가족들과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7. 버림받은 남로당의 영웅들 노무현 정부의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는 4.3폭동의 발발 기간을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은 3.1기념식장에서 경찰의 발포사건이 발생한 날이고, 1954년 9월 21일은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된 날이다. 노무현 정부가 정의한 제주4.3의 발발기간은 기존에 규정했던 4.3 기간과는 많이 달랐다. 기존 제주4.3의 발발 기간은 4.3사태가 발발하던 1948년 4월 3일부터 마지막 빨치산 오원권이 체포되던 1957년 4월 2일까지라고 정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4.3정부보고서에서 정의한 4.3폭동의 기간은 4.3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 입맛에 맞게 아귀를 맞춰놓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의 4.3기간에 대한 정의는 제주4.3에 대한 대표적인 왜곡 사례 중 하나이다. 1947년 3.1기념식장에서 벌어진 발포사건은 4.3폭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건은 아니었다. 남로당은 1947년 3.1기념식을 빙자하여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정치 행사를 벌였고, 이 행사는 불법 폭력 집회로 변질되어 경찰의 발포가 발생했다. 이날 3.1기념식장에서 벌어진 발포사건은 제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각지에서 발포사건이 벌어진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따라서 제주에서만 발생했던 남로당의 4.3폭동을 전국에서 벌어졌던 3.1발포사건과 연결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4.3중앙위원회는 4.3폭동의 기점을 폭동 발발 13개월 전의 3.1발포사건으로 규정했다. 이런 이유는 4.3폭동의 발발 원인을 경찰의 발포로 규정함으로서, 남로당의 폭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색깔을 입혀, 4.3폭동을 ‘민중항쟁’으로 윤색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4.3중앙위원회는 4.3폭동의 종점도 제멋대로 수정했다. 4.3폭동은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빨치산 오원권이 체포됨으로서, 만 9년에 걸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4.3정부보고서는 1954년 9월 21일을 종점으로 규정함으로서 마지막 2년 7개월의 기간은 팔아 먹어버렸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이 전면 개방된 이후에도 한라산 중에는 남로당 최후의 폭도들이 여전히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최후의 저항 기간을 삭제해 버림으로서, 남한 좌파들은 4.3을 항쟁으로 치하하면서도 4.3폭동 최후의 폭도 5인방에는 외면했다. 4.3폭동의 폭도들은 북으로부터 외면 받은 존재였지만, 4.3폭동 최후의 폭도들은 남한의 좌익들에게도 버림받았던 것이다. 한라산이 개방된 후에도 최후의 5인은 민가를 약탈하면서 버티다가 1957년 4월 2월 마지막 폭도 오원권이 체포됨으로서, 제주4.3은 만9년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폭동을 숭상하는 남한 좌파들의 시각에서보자면 이들은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러나 이 최후의 폭도들은 최후의 기간에 항쟁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들은 항쟁투사의 모습보다는 말 그대로 폭도로 전락하여 목숨을 연명하는 데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4.3폭동을 4.3항쟁이라 주장하는 좌파들에게 이 최후의 5인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5인은 유용성이 떨어진 소모품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6.25가 끝나자 김일성은 6.25남침의 패전 책임을 물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수뇌부를 숙청했다. 6.25가 끝났을 때 4.3폭동의 남로당 전사들은 끈이 떨어진 상태에서도 저항을 계속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역사의 장막 저편에서 4.폭동의 남로당 전사들은 흙먼지를 날리며 역사의 무대 위로 화려하게 등극했다. 통일 조국을 위해 싸웠던 위대한 전사로, 대한민국 군경의 학살에 숨져간 무고한 희생자로, 4.3의 남로당 전사들은 대한민국의 역사 중심부로 복귀했다. 그러나 여기에 4.3폭동 최후의 5인은 없었다. 4.3폭동 최후의 5인은 북한에게도 버림받고, 남한 좌파들에게는 버림받는 비운의 주인공들이었다. 4.3폭동은 1948년 4월 3일 발발하여 마지막 폭도 오원권이 체포되던 1957년 4월 2일 종료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4.3중앙위원회는 4.3폭동의 기간을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라고 자기 입맛에 맞게 바꿔버렸다. 머리는 붙이고 꼬리는 잘라버린 것이다. 유리한 것은 붙이고 불리한 것은 잘라서 만든 4.3폭동의 기간은 전형적인 노무현 정부의 ‘게리멘더링’이었다. 이러한‘게리멘더링’으로 얼룩진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는 노무현 정부가 역사의 진실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의 정치적 취향대로 만들어낸 ‘역사의 괴물’이었다. 끝. 보충자료 제주4.3평화공원의 기념관에는 폭동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끌고 들어갔던 사람들의 위패와, 그 폭동의 소용돌이 속에 스러져갔던 선량한 희생자가 함께 수용되어 있다. 남로당 제주도당 경리부장(회계부장) 현복유, 남로당 제주도당 선전부장 현호경, 남로당 제주도당 부위원장 간부부장 이신호(일명 이신우),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해방군사령관 김의봉(제3대 폭도 대장),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해방군 참모장 김완식, 북한 인민군 사단장 이원옥,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 김달삼 비서실장 박태전, 남로당 서남부지역 인민유격대 총책 고두옥, 제주지검에 침투한 이재만, 경찰에 침투한 송창염, 인민유격대원 변창희, 북한 인민군 장교 김기추,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 백창원, 국군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국군 중사 강자규, 조천면 인민위원회 문예부장 겸 제주 건국준비위원회 집행위원 김시택, 3.1절 경찰파업에 참여한 후 빨치산으로 입산한 경찰 강수헌, 국군 41명 탈영사건 주도범 강정호, 다랑쉬굴 아지트 폭도 대장 오달용, 인민위원회 간부 겸 폭도 대장 유신출, 인민해방군 지도부 송원병, 총파업 투쟁위원 겸 유격대 전투 지휘자 김상훈, 경북 예천에서 제주로 파견된 경찰로서 빨치산으로 입산한 윤상근, 동료경찰을 납치한 경찰 장두백, 북한으로 밀항하여 해주경찰서장이 된 폭도 간부 현만호, 북촌리 경찰 납치 살해 주동자 김진태... 자료정리(2016-11-30) 대한해외참전전우회 창원시지회 사무국장 겸, 보훈지킴이 창원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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